묵상이 담긴 여행/성지순례: Egypt·Jordan·Lebanon

[성지순례 2] 광야에 홀로 선 싯딤나무

wisdomwell 2007. 10. 27. 11:31

광야에 홀로 선 베두윈 장막과 싯딤나무

 

 

버스를 타고 시내산을 떠나 이곳에서 북동쪽 아카바만의 홍해 옆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지난 새벽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지 못했던 시내광야가 차창 밖으로 아득하게 펼쳐진다. 그야말로 불모의 땅. 사방이 모래였다. 심심치 않게 바위 언덕들이 모래 광야에 곡선을 그려놓고 있었다. 어떻게 수십만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축들이 40년의 세월을 이런 광야에서 보낼 수 있었단 말인가? 도저히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인간이 생존해나갈 수 있는 조건과는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나님께서 먹여주고 마시게 해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척박한 환경임을 알 수 있었다. 평소 나의 머리로 상상해오던 광야의 이미지보다 더 열악한 조건이었다. 그 광야가 끝간데 없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가끔가다 베두윈 사람의 장막이 사막 가운데 동그마니 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양과 염소를 치며 풀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영원한 나그네의 삶을 수 천년의 세월 동안 그대로 거듭하고 있었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그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을 정도로 베두윈인들의 생존양식엔 별 변화가 없다.

 

베두윈인들의 장막이 그 넓은 광야 가운데 하나씩 덩그러니 쳐져 있는 것처럼, 아이보리색 모래 위에 유일하게 연쑥색의 말라보이는 나뭇잎을 달고 간간이 서 있는 나무가 있었다. 신기했다. 물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런 사막 위에 그래도 작지만 푸르른 그늘을 제공해 주는 나무가 있다니.... 꼭 한 그루씩 가뭄에 콩 나듯이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모래 바람 속에서도 뿌리를 박고 서 있었다. 어떻게 그 잎이 푸른 빛깔을 낼 수 있는지 궁금하고 대견스러웠다.

 

"저기 저 나무가 무슨 나무지요?" 안내 선교사에게 물었다.

"오, 저거요? 싯딤나무예요. 성경에 보면, 저 나무로 법궤를 만들었다는 조각목이지요." 반가웠다. 저 나무가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 그 조각목(아카시아로도 번역, 그러나 한국의 아카시아와는 다름)이라니....

싯딤나무(히브리어 '쉬타', 영어 'Acacia')는 유대 광야나 아라바 지역 (사해 남쪽에서 아카바 만 까지의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 시나이 반도 등 메마른 땅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법궤나 성막의 널판, 채, 띠, 상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출 25,26장). 쉬타의 나무 둥치는 아주 가벼우나 저항력과 내구성이 뛰어난데, 이러한 특징을 살려 70인 역은 쉬타를 15번이나 썩지않은 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싯딤나무는 과장해서 그 뿌리가 100m 깊이까지 내려간다고 해요. 무리지어 나진 않고 군데군데 자라지요."

이 메마른 시내광야에서 성막을 짓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목재는 싯딤나무밖에 없었다. 풀조차 보기 힘든 이 척박한 땅에서 자랄 수 있는 유일한 나무였으므로.... 그리고 유독 이 나무가 이 곳에서 자랄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깊이 깊이 그 뿌리를 땅 속으로 내리고 있었던 데 기인하리라. 모래 속 깊은 곳에 잦아든 지하수와 연결되었기에 그 푸른 생명을 유지하는 광야 속의 특이한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생명의 근원인 물과의 만남이 싯딤나무로 하여금 이 사막에서 잎들을 피우며 목재로 사용될 정도로 자라게 했으리라.

 

 

"내가 싯딤 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신명기 10장 3-5절]

이렇게 모세는 신명기에서 싯딤나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시내광야는 나무들의 생존이 불가능한 곳이었지만, 유독 깊이깊이 뿌리를 내려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었던 싯딤나무만은 광야의 메마름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십계명을 담는 법궤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주여, 내 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에 삶의 삭막함과 고통 가운데 좌절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싯딤나무처럼 내 신앙의 뿌리를 더 깊이 깊이 내려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싯딤나무가 십계명을 가슴에 품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나의 가슴에 보배처럼 당신의 말씀을 새기고 사는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시편 139편 17-18절]

베두윈 여인의 구슬 목걸이

 

 

시내산에서 바위산과 모래로 이어지는 광야길을 지나 누웨이바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누웨이바는 시내반도의 동쪽, 아카바만 홍해를 끼고 있는 휴양도시입니다. 밝은 태양빛 아래 호텔 입구에 심겨져있는 버겐빌라의 진홍색이 유난히도 선명합니다. 팜 트리들도 그 시원스런 잎사귀들을 펼치고 새파란 하늘과 나무 없는 바위산을 배경으로 서 있어 사막에서 오아시스로 들어온 것을 실감케 합니다. 더구나 홍해의 청색 물빛 속엔 보는 이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바다인데, 호텔엔 우리 일행 뿐 해변은 한적합니다.

 

 

아카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아카바 공격을 기적적인 승리로 끝낸 로렌스(피터 오툴)가 낙타를 타고 홍해 바닷물에 서 있을 때, 알리(오마 샤리프)가 승리를 축하하는 화환을 바닷물에 던지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인지 이 아카바의 홍해가 더 정겹게 느껴집니다. 기념으로 이곳 바다의 조개껍질을 주워 주머니에 간직합니다.

호텔 근처의 한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식당앞에 베두윈 어린 소녀들이 조잡해 보이는 구슬로 된 팔찌, 목걸이 등을 보이며 one Dollar! one Dollar!" 호소하는 눈빛으로 손님을 부릅니다. 일행중의 김 전도사가 팔아주려는 마음으로 구슬 장식들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액세서리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어린 나이에 이렇게 좌판을 벌이고 있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장식 두 개를 샀습니다. "어머, 직접 구슬목걸이를 만드나봐.. " 누군가의 말에 아이들 뒤쪽을 보니 아이들의 어머니인 듯한 50대의 한 여인이 쭈그리고 앉아 구슬 장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여인의 햇빛에 그을어 구리빛이 된 얼굴에 머물자, 머쓱한 듯 눈길을 피합니다. 버스 출발시간이 급해 차에 올랐습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여행기념품으로 사온 작은 선물들을 정리하다가 이때 사온 베이지 색 구슬 목걸이와 빨간 구슬 팔찌를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조그만 구슬 알들이 촘촘히 꿰어져 있었는데 예술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디자인의 장식물임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이 장식물들을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자꾸 느끼고 있었습니다. 구슬알이 너무도 작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 아팠습니다. 이렇게도 작은 구슬을 꿰느라고 그 베두윈 여인은 얼마나 많이 눈을 비벼댔을까? 원 달라를 받기 위해 그녀가 꿰어야 했던 2백개쯤 되는 구슬알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팔아줄 것을....

 

요르단 페트라에서는 굴러다니는 작은 돌을 1달러에 강제로 떠맡기듯 팔던 아이들도 있었고, 화장실 한 번 가는데 1불을 요구하던 이집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두윈 여인은 오랜 시간의 투자와 육체적인 희생에 덧붙여 그녀의 예술적인 창의력까지 함께 모아진 하나의 작품을 단 1달러에 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 뒷전에 숨듯이 앉아 구슬장식을 팔던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 같아 자꾸만 미안한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언젠가 이곳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어 그녀를 만나는 인연이 주어진다면, 그녀의 예술적인 감각에 대한 칭찬과 함께 그 노고에 걸맞은 액수를 지불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랍어로 된 전도지나, 내 어렸을 적 선교사들을 통해 받았던 작은 쪽복음이 있어 전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70신, 2006년 5월호에서ㅡ 사진: 2006년 4월 이집트 누웨이바(시나이반도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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