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알의 땅: 바알백(Baalbeck)
****제우스 신전의 거대한 기둥들
다섯 시 전에 바알백에 도착해야 신전을 관광할 수 있을 텐데, 시간이 지체되어 문을 닫으면,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안내를 하는 안 선교사가 말한다. 바알백이라... 금시초문인 도시 이름이다. 바알이란 이름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이방의 우상이 아닌가? '백'은 '땅'이란 말로 바알백 하면 곧 "바알의 땅"이란 뜻이 된다. 바알신을 위한 산당이 베카 벨리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까닭에 성읍의 이름이 바알백이 되고 말았다.
도시의 이름이 미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사람들이 "바알의 땅"에 들어선다. 이름은 좋으나 싫으나 그 사람의 정체감을 형성하는데 한 몫 하는 것이기에, 갑자기 내가 바알백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이 고맙게 생각된다.
**바알 백 입구 프로필리아 (Propylaea)
거의 오후 다섯 시가 되어 문을 닫을 시간인데, 레즈리가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신전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 때로는 이렇게 사정하면 통하는 헐거움 속에서 인간다움이 느껴진다. 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맞닥뜨린 바알백 신전의 유적은 벌어진 입을 닫을 수 없을 만큼, 위압적인 것이었다. 지금 보는 신전은 B. C. 3세기 말, 로마의 지배하에 지어지기 시작한 로마의 신전들이다. 원래 페니키아인 들이 지었던 바알의 산당 자리에 알렉산더 대왕은 제우스신전을 건축하고 이곳을 헬리오폴리스(태양신의 도시)라 불렀다.
*** 중앙 뜰
그후 로마인들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제우스 신전을 파괴하고, 그들을 위한 주피터 신전을 새로 짓는다. 4세기 말경, 기독교가 번성하면서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신전을 폐쇄하고 제단을 무너뜨리고 그 돌들을 이용하여 이곳을 바실리카 스타일의 교회로 변형시킨다.
그후 연이은 후속 정복자들의 침입과 지진의 강타로 이 고대의 바알백은 오랜 세월 동안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버려져 있었다.
7세기, 아랍인들이 이곳을 정복하고 신전 주위에 성벽을 건축한 뒤, 그들의 요새로 사용한 까닭에 바알백 요새로 불리게 된다.
이 신전이 다시 그 모습을 부분적이나마 회복하여 옛 로마인들이 3세기 경 건축했던 주피터 신전의 원래 구조를 갖추고 다시 복구케 된 데는 20세기 초 독일과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의 노력이 주효했다.
바알백의 신전에 들어가려면, 우선 입구인 프로필리아(Propylaea)를 지나게 된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세워진 입구를 지나면 6각형으로 된 앞뜰이 있고, 이 뜰은 두 개의 희생 제단이 있었던 넓은 중앙 뜰로 이어진다
.
뜰 안에 들어서니 주피터(바알: 태양의 아들) 신전이 있었던 자리가 눈앞에 전개된다. 단지 여섯 개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용이 압도적이다. 높이 22미터의 코린트식으로 지어진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이러한 기둥들이 원래는 54개가 있었단다. 이 태양신의 신전은 네로 황제의 통치시 지어졌는데 길이 88미터, 폭이 48미터에 달하는 장대한 신전이었다. 신전을 짓기 위해 사용된 돌 가운데는 돌 하나의 무게가 1천톤이나 되는 거석들이 세 개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큰 돌들을 다룰 수 있었는지, 신전의 그 곧게 뻗어 올라간 거대한 돌기둥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인력이 이 거대한 역사(役事)를 위해 동원되었을까?
***박카스 신전 입구. 거대한 돌기둥이 누워 있어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주피터 신전보다는 소규모이나, 그 모습이 원형에 가깝게 보전된 박카스 신전(A. D. 2세기)과, 이들과는 거리를 둔 비너스 신전이 이곳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박카스(디오니소스: 술과 환락의 신) 신은 번영과 다산을 상징하는 신이다.
"이 조각들을 보세요" 레즈리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현관 기둥벽을 가리킨다.
오랜 세월 속에 닳긴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포도나무와 양귀비와 여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술과 아편과 성적(性的)인 쾌락을 상징하지요. 이 박카스 신전 안에서 술과 아편과 음행이 제의처럼 행해졌어요. 박카스 신을 잘 섬기면, 천국에 가서도 이러한 환락의 삶이 보장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 진탕 마시고 향락에 빠지게 한 것이지요" 레즈리의 설명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린다.
가나안 인들의 바알신앙의 전통이 그대로 박카스 신전에도 있지 아니한가? 폭탄을 안고 자살 테러를 하도록 테러리스트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네가 순교하면 하늘나라에서 열 명의 처녀들이 너를 수발들 것이다."라고 천국을 설명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것 역시 이슬람교 속에 슬며시 들어간 바알 신앙의 흐름이 아닐는지...
어디 이슬람교뿐이겠는가? 바알 신앙은, 기독교 속에도 기생하여 적당한 혼합주의로 이끌어간다. 바알 신앙은 우리네 삶 속에 흉물스런 바퀴벌레처럼 도사리고 있다. 평소엔 보이지 않다가도 한 밤중 갑자기 불을 키면, 화들짝 놀라 재빨리 숨어버리는 바퀴벌레처럼 어느 구석엔가 몸을 숨기고 있다.
박카스 신전 앞에서 모두들 당대 사람들의 천국관에 대해 어처구니 없어하며 웃음을 터트렸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이기심과 욕심에 이끌려 살아간다면 나 역시 바알 신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
***박카스 신전의 기둥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장 16-17절]
입구를 제외하곤 두터운 돌벽으로 막힌 박카스 신전 안을 둘러보며,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낀다. 악령의 기운이 아직까지 감도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일까? 우상숭배의 전통이 팽배한 곳, 바알의 땅 중에서도 바알 신전의 중심부이기 때문일까? 저녁 해가 기운다.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꼭꼭 여미며 바알백 신전을 뒤로 한다.
폐관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우리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 한 아랍계의 할아버지가 차가운 바 레바논 관광 안내책을 내어민다.
책을 사들고 돌아나오는데 한 소년이 불쑥 껌을 내민다. 별로 팔지 못했는지 애원하듯 울상을 한 모습이 안쓰러워 껌을 한 통 팔아준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바알의 땅을 벗어나, 레바논 최대의 도시 베이루트를 향해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은 산길을 향해 속력을 낸다.
최근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전쟁 때, 이스라엘의 미사일이 이 바알백에도 떨어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곳이 시아파 아랍인들이 사는 지역임을 후에 타임지를 보고 알았다. 시리아와도 가까운 위치에 있기에 시리아의 지원을 경계한 공격이었으리라. 이래저래 정치보다는 생존이 문제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다.
글: 이영순 (지혜의 샘 블로그)
사진: 레바논 바알백에서. 2006년 3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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