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보산 산정에서
메드바(마다바)에서 북으로 6마일 떨어진 모세 기념교회가 세워진 느보산에 가려면 오후 5시 이전에 그곳에 도착해야만 한다. 시간이 촉박하여, 메드바는 단지 시가지를 버스로 지나며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간신히 마감시간 바로 전에 느보산에 도달했다. 이미 문을 닫으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사정을 이야기하니 들어가도록 허락해준다. 미국에서 같으면 어림없었을 텐데, 이렇게 사정을 봐주는 여유랄까, 어리숙한 구석이랄까? 하는 것들이 오히려 인간적인 냄새가 나서 마음에 든다.
느보산은 요단강 하구에서 동편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있다. 느보산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세를 기념한 비잔틴 시대의 교회와, 광야에서의 불뱀과 놋뱀 사건을 상기시키는 높이 세워진 놋뱀 조형물이다. 4세기 경 처음으로 교회가 지어졌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곳에 모세의 무덤이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 교회 내부에는 화려한 문양의 모자이크 바닥이 있고, 모세의 기념 묘가 있다.
광야 여정의 말미를 장식하는 시점에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느보산 산정에서 눈아래 펼쳐지는 요단 건너 약속의 땅을 바라본다. 수년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 있었던 바로 그 전망대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구름이 낮게 깔린 어스름 저녁이어서 시야가 흐릿하다. 오른 편으로 간신히 사해가 뿌옇게 보인다. 중앙 아래쪽에 모압평지가 있고 날이 맑으면 그 뒤편으로 요단강과 강 건너 여리고 성을 볼 수 있단다. 왼쪽 저 멀리엔 세겜이 있다.
느보산에 올라 하나님 주시마 약속한 가나안 땅을 보고 있는 모세의 모습을 그려본다, 눈 앞에 펼쳐지는 그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출애굽의 그 험난한 사건들과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넌 기적,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이 주신 율법,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주신 사막, 가데스바네아로부터 세렛강에 이르는 광야에서의 그 기나긴 세월. 반복하여 반역과 징계와 하나님의 기적들을 번갈아 경험했던 불모지에서의 혹독한 훈련의 삶, 그리고 최근 아모리 왕 시혼과의 전쟁에서의 빛나는 승리. 이제 40년간을 그리던 그 약속의 땅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는 자신이 모압땅에서 죽을 것임을 감지한 채, 이렇게 이 산 위에 서서 멀리 멀리 하나님 주신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세가 모압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신명기 34장 1-3절]
모세의 마지막 여정(旅程)
"그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명기 34장 10절-12절]
신명기 34장, 모세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사들을 묵상합니다. 모세는 끝까지 사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이 끝날 무렵, 조용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응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 죽음의 이야기가 참 담담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리도 들어가기를 열망했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그를 부르십니다. 모세는 모압평지에서 여리고 맞은 편에 있는 봉우리인 느보산에 오릅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게 될 약속의 땅을 직접 보여 주십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북부 지역부터 시작하여 지중해 해안과 네게브, 가장 가까운 지역인 요단강 유역까지 둘러보게 하십니다.
몇년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곳 느보산에 올라 멀리 약속의 땅을 바라보던 타임(Time)지의 표지가 떠오릅니다. 은발이 흩날리는 노구(老軀)의 몸을 이끌고 감회에 잠긴 듯 그가 둘러보고 있는 땅들은, 태양빛을 하얗게 반사하고 있는 황량한 광야와 언덕들이었습니다.
"워킹 더 바이블(Walking the Bible)"을 저술한 부르스 페일러는 물리학자 데이빗 패이먼의 수학적 계산을 근거로, 가장 맑은 날, 혹은 가장 맑은 밤이라도 신명기에서 모세가 보았다고 하는 그 모든 광경을 느보산에서는 실제로 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지구의 만곡(彎曲), 광속(光速), 인간의 시력을 모두 따져본 결과 그 누구도 느보 산에서 갈릴리, 지중해, 네게브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가 오히려 느보산을 오른 부르스 페일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물리적인 차원은 이 순간 정신적인 차원에 비해보면 그 중요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그의 생각을 정리해 보여줍니다.
"물론 그(모세)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해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의 비극은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능력으로 결국에는 보상을 받았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그는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준 예언의 비전을 얻게 된다. ..... 모세가 성취의 꼭지점을 획득하는 것은 산꼭대기에서 외부의 광경을 굽어보기 때문이 아니다. 바깥을 내다보는 것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모세가 약속의 땅의 완전한 차원, 온전한 영광을 보게 되는 방법은 마음의 눈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참되게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뿐이다."
그러기에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그리도 그리워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멀리 바라보면서도, 평화로움 속에서 그의 이 땅에서의 오랜 여정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왜 나는 들어갈 수 없습니까?" 절규하고 부르짖고 따지고 항의하지 않습니다. 투덜대지도 않습니다. 담담히 하나님의 결정에 순응합니다.
40년 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광야를 진행해 가면서,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친구처럼, 애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그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빛만 보아도, 그 분의 뜻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모세는 가까웠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face to face) 아시던 사람"이였습니다. 이렇게 친밀하게 하나님을 알았던 선지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또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신명기 마지막 부분들을 장식하는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들은 물 흐르듯 담담하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듣는 듯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함께 어울려 서로를 격려하고 윤택하게 하며 하모니를 이루는 크로이첼 소나타처럼, 모세의 마지막 삶들은 늙은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감이 빚어내는 풍요로운 이중주입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광야에서 목자일 하며 끝나가는구나..." 열등의식과 의기소침에 빠져있던 80세의 노인, 이미 꿈을 상실한지 오래된 모세를 선택하여 그에게 능력과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신 하나님. 그러나 자신의 무력함과 약함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 분께 순종케 된 모세... 그리고 순종하는 종에게 더 큰 능력을 공급해주셔서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 그러기를 40여년... 그러다보니 그의 순례의 여정 마지막엔,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자신의 뜻이 되어버린 모세... 이심전심(以心傳心) 두 분 사이엔 아무런 거침이 없었습니다.
임종 당시 모세는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또 기력도 쇠하지 아니하였는데 그 나이 120세였습니다. 최후까지 충실하게 하나님 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간 사람의 서사시 같은 죽음이었습니다. 비록 열망하던 가나안 땅엔 들어가지 못했지만, 40년 광야 길을 함께 동행해 오셨던 하나님의 집에, 고향집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품안에 안기는 조용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나그네길, 유리하는 자의 길에서 돌아와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브루스 페일러가 지적했듯이 모세 오경은 모세의 비극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독특함, 신과의 독특한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끝납니다.
"모세는 땅을 얻지 못하지만 약속을 얻는다. ... 땅만이 목적지가 아니다. 인간이 신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곳, 그 곳이 바로 목적지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성서가 묘사한 광경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세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땅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우리가 '보아야 하는'곳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브루스 페일러 "Walking the Bible"에서-
주님 사랑 안에서, 이영순 드림.
글: 새벽에 쓰는 편지 제 80신 (2007년 3월)
사진: 2006년 3월 느보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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