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항할 곳 없는 배
지난 달 다녀왔던 롱비치에서 카타리나섬에 이르는 뱃길을 마음에 떠올려봅니다.
롱비치 항에서부터 잔뜩 흐린 날씨였었는데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갔을 때는 하늘과 바다가 온통 잿빛이었습니다.
무엇이 하늘이고, 무엇이 바다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한 회색물감이 온 세상에 짙게 풀어져 있었습니다.
카타리나 익스프레쓰, 쾌속정이 가르는 바닷바람은 강력하고 거칠고 차가웠습니다.
한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하는 뱃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수평선상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망망대해만이 펼쳐지는 시간들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 항해가 끝나는 곳에 정박할 항구가 있다는 것, 향해 갈 목표가 있다는 것. 도착할 곳에 대한 소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만일 내가 탄 배가 이렇게 전 속력으로 질주하곤 있지만, 딱히 정박할 항구가 없이 그저 이렇게 망망대해 위에서 떠돌수 밖에 없는 배라면 어떨까?
상상하기조차 두려워집니다. 언젠가 언뜻 뉴스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
아무 항구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그저 기약없이 바다위에 떠 있을 수밖에 없었다던 난민들이 탔던 어떤 배의 기사가 생각납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닐는지요.
수평선 저 너머 우리의 인생의 뱃길이 끝나는 곳에 정박할 항구가 있고
기쁨으로 우리를 마중나와 줄 그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항해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의 뱃길이 폭풍에 휩싸여도, 고난이 닥쳐도, 기항할 항구의 소망이 우리를 그 어려움에서 구원해 줍니다.
갈 곳이 없는 배.
그저 망망대해 위에만 떠 있을 수밖에 없는 배.
소망이 없는 배.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의 배처럼 영원히 떠돌아 다니도록 저주를 받아 기항할 곳이 없는 배는 처량합니다.
그 항해길이 아무리 햇빛 찬란하게 빛난다 해도, 갈 곳에 대한 희망이 없는 배는 이미 심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점을 상실한 인생, 그래서 수평선 저 너머에 대한 아무런 소망도 없는 인생의 뱃길은 삭막하고 쓸쓸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복음 3: 17-18]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스는 그의 임종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다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하루치의 생명과 바꿀 수 있겠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내 앞에 다가오는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껑충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 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암 부스의 아내 캐더린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녀의 삶을 마무리합니다.
"물이 밀려들고 나도 밀려간다. 그러나 난 물 위에 올라 있다. 죽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더 나은 생애가 시작되고 있다.
이제 와보니 죽음이야말로 아름답고도 귀한 것이구나!"
하나님을 거부하며 살았던 인생과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던 인생이 마지막 종착지에서 보여주는 극명한 차이입니다.
기항(寄港)할 곳이 있는 사람들의 죽음은 복됩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글, 사진: 이영순 (뉴질랜드 Milford Sound에서 촬영 2006년 12월)
'새벽에 쓰는 편지 > 지혜의 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마스 아켐피스와 Chantry Flat의 시냇물 (0) | 2009.01.20 |
---|---|
일상(日常), 하나님의 신비: Seeing God in the Ordinary (0) | 2009.01.18 |
체질화된 감사 (0) | 2008.11.09 |
사랑과 슬픔의 이중주 (0) | 2008.05.24 |
나무를 심은 사람 (0) | 2008.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