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 레이크(South Lake)의 두 얼굴
트윈 레이크, 메리 레이크, 그랜드 레이크, 준 레이크, 새브리나 레이크.... 과연 8천, 9천 피트 높이에 있는 산정의 호수들은 나무들이 이미 그 옷을 벗은 늦가을 속에서도, 하늘과 구름과 산등성을 수면에 담은 맑은 물을 가득히 그 가슴에 안고 있었습니다. 산 속에서의 계절의 오고감은 한층 빨라, 벌써 초겨울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트윈 레이크 호숫가 작은 관목엔, 오랜만에 보는 고드름이 잔 가지마다 달려 있었습니다. 고도(高度)가 높아질수록 침엽수림 사이로 겨울의 도래를 알리는 눈발이 더 거세게 흩날렸습니다.
준 레이크로 가는 굽이굽이 산길에서 가을의 막바지를 장식하는 노랗게 물든 아스핀 단풍들을 만났습니다. 암석의 산봉우리와 아스핀 나무가 무리지어 서생하고 있는 산등성이, 그리고 숲 사이로 뚫린 호수로 가는 길. 하얗게 날리는 눈발이 노란 색으로 물든 아스핀과 커튼우드 나무들의 단풍진 잎들 위에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가을과 겨울이 만나 서로를 맞고 보내는 지점에 서서, 마치 내 영혼이 샤워를 하고 있는 듯한 상쾌함을 맛보았습니다.
새브리나 레이크와 사우스 레이크는 비숍 시에서 약 20여 마일 떨어진 해발 8천 피트, 산꼭대기에 있는 호수들입니다. 오웬스 계곡을 끼고 올라가게 되는 이 산정의 호수들은 그 주변에 아스핀 나무들이 무성해 가을이면, 이곳의 노랗게 물든 아스핀 가을잎들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단풍명소이기도 합니다. 9년 전, 이 곳에 와서 짙은 청색의 호수, 노란 아스핀 나뭇잎들과 초록색 침엽수림의 조화를 렌즈에 담았었던 인상적인 곳이기에 또 다시 방문하여 가을을 보고 싶었습니다. 호수를 끼고 난 오솔길을 따라 하이킹을 해보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지난 번 왔을 때, 10분 정도 걷다가 되돌아 왔던 것이 못내 아쉬웠었기 때문입니다. 청명한 가을 공기,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심장형의 황금빛 아스핀 잎사귀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바르르 떨며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시냇물가에 앉아서 가져온 점심을 먹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곳의 아스핀 나무들은 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갈색의 무표정한 얼굴로... 산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눈발이 더 날렸습니다. 드디어 사우스 레이크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는 순간, 차가운 강풍이 뼛속까지 스며들었습니다. 호수는 마치 모노크롬 영화를 보듯이 무채색이였고, 날리는 눈 때문에 회색빛 산과 호수가 그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초겨울의 거센 바람은 모처럼의 방문자들을 사정없이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하이킹은 커녕 워낙 산길이 가파른지라, 내려가는 길이 미끄러울까 걱정스러워 얼른 되짚어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려오는 길, 잎을 모두 잃은 아스핀나무 숲을 가리키며 상상 속에서 시간의 필름을 되돌려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마치 사우스 레이크의 변호사가 된 것처럼 동행한 언니들에게, 거듭거듭 햇빛 밝았던 9년 전 어느 가을날의 이 호수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계절과 시간과 날씨에 따라서 같은 호수가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그러나 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처음 보았던 그 청명한 가을날의 사우스 레이크, 아스핀 나뭇잎들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진한 청색의 호수입니다. 이 호수로의 여행이 이번 이 처음이었다면, 아마도 다시는 구불구불 경사진 산길을 헤집고 올라가 이 호수를 방문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춥고 생명력 없는 잿빛 호수를 또 다시 찾을 생각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사우스 레이크의 그 빛나는 아름다움과 만날 기회도 없어졌겠지요. 첫인상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문득, 이런 첫인상 때문에, 그 장소의 진가(眞價)를 간과해버린 여행지는 없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만일 그 대상이 자연이 아닌 사람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한 것이 아닌가?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난 시기가 공교롭게도, 그가 어두운 겨울의 골짜기를 걷고 있을 때였다면? 나는 그 사람을 "겨울의 사람"으로 낙인찍고 줄곧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그를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 아닌가? 그가 보여줄 봄의 얼굴, 가을의 표정들을 간과한 채로... 그의 진가를 묻어둔 채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는가? 다시 만나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스데반의 죽음에 동조하며 서있던 사울(바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하여 돌아다니던 사울이란 청년을 처음으로 보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선입관을 벗어 던지고, 사울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데는 바나바의 열린 마음이 절대적인 역할을 합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더 이상 "겨울의 잔혹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 깨어진 "봄의 새로운 사람"임을,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주지시킵니다. 사울이 사도 바울로 도약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넉넉한 사람, 바나바.
사우스 레이크의 상반된 두 얼굴은 제게 말해 줍니다. 선입관, 고정관념, 편견에서 자유로운 바나바 같은 넉넉한 존재가 되라고... 어느 누구나 겨울을 걸을 때도 있고, 봄의 햇빛, 가을 단풍 속을 거닐 때도 있는 것이므로...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그 두 얼굴을 함께 품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41신에서 (2003년 12월)
사진: California Bishop 부근 South Lake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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