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보름달
2001년 5월 세도나를 다녀온 이래, 세도나를 다시 찾아가 신(神)의 창조의 신비를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했었습니다. 그러나 첫 여행때 그랬던 것처럼 관광버스 타고 그저 겉핥기로 세도나를 보고 싶진 않았습니다. 세도나를 알고, 맛보고,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도로주변의 경치로 만족해야 하는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의 여행이 아니라, 세도나의 속내까지를 볼 수 있는 여행을 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세도나 하면 늘 트레이드 마크처럼 등장하는 성당바위(Cathedral Rock)도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직접 나의 차를 가지고 애리조나까지 끝없이 멀게 느껴지는 광야길을 횡단하며 하루종일 혼자서 운전해야 하는 부담이 있기에 망설여 왔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친구가 한국에서 방문한다고 하기에 드디어 세도나 여행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10월말이나 11월초에 세도나 오크 크릭의 나무들이 단풍이 드는 시기라고 해서 그때를 염두에 두고 친구의 LA 방문을 계획했었습니다.
집에서 세도나까지는 447마일. 60마일로 계속 달린다고 해도 운전시간만 7, 8시간. 중간에 점심식사하고 가끔씩 휴식 시간을 갖는다면 도착하기까지 9시간 내지 10시간이 소요될 것이었습니다. 10월도 하순에 접어들었기에 저녁 6시도 못되어 일몰을 맞이할 것이므로, 해지기 전에 도착하여 예약한 모텔을 찾는 것이 좋을 듯 싶었습니다.
오전 9시경 출발, 10번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를 줄기차게 달려, 피닉스를 거쳐 북쪽으로 17번 하이웨이를 타고 올라가 세도나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피닉스를 지나자 하이웨이 노변에 파이프 오르간처럼 우뚝 우뚝 선 커다란 선인장들의 모습이, 이곳이 애리조나임을 실감케 했습니다. 17번에서 벗어나 세도나로 향하는 좁은 길로 들어섰을 땐 이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세도나 시내에 가까워 졌는가? 어둠속에 불쑥불쑥 예의 그 붉은 바위들(Red Rock Canyons)의 정겨운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왔구나. 이미 해가 진 탓에 바위들은 본래의 제 빛깔을 잃어버린 채 검은 실루엣으로 불쑥 다가왔다가는 뒤로 사라져가곤 했습니다. 구불구불 좁은 길을 달리며 언뜻언뜻 숨바꼭질하듯 나타나곤 하는 둥근 달을 만났습니다. 바위 위에 두둥실 환하게 떠오른 보름달.
그러나, 먼저 모텔을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모처럼 만나는 세도나의 보름달을 즐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모텔에서 여장을 풀며 바위산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깜깜해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내일, 또 모레 이곳에 머물 텐데.... 내일 밤 달을 보러 나가야지..."
사람이 아무리 계획을 세울지라도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제가 계획한 그 내일은 결국 오지 않았습니다. 비구름이 몰려와, 세도나가 가을비로 온통 젖어버리는 날들이 제가 여행하고 있던 이틀 내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예기치 못한 불상사였습니다. 나중에 어느 친구가 인터넷에 올린 "내일이면 늦으리"란 작자미상의 글을 읽으며, 세도나의 잃어버린 보름달을 아쉬움 속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기에 지금 하십시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지어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내일이 있으리라 믿지 말고, 그날 그때, 세도나 붉은 바위들을 비추는 보름달을 보았었더라면... 언제 또 세도나에서 보름달을 볼 수 있겠는가? Here and Now,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핑크 지프 관광(Pink Jeep Tour): 세도나 체험
"하나님은 그랜드 캐년을 만드시고 좋아하셨지만, 사시기는 세도나에서 사셨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갖는 세도나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엿보이는 말입니다. 세도나를 좀 더 알고, 맛보고,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떠나오기 전부터 이곳에 운행하는 핑크 지프를 타보리라 계획했습니다. 세도나를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모처럼 한국에서 온 친구에게, 세도나의 주홍색 붉은 바위와 그 짙은 청색 하늘에 뜬 새하얀 뭉게구름을 보여주고도 싶었습니다.
세도나에서 맞는 첫 아침. 창문을 연 순간, 아뿔싸! 온통 잿빛의 흐린 날씨에 빗줄기도 제법 거셌습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벼르다가 온 모처럼의 여행인데 이렇게 비가 오다니... 기온도 급강하하였고 북쪽 플랙스탭엔 눈이 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기예보는 시월에 이렇게 많은 강설량을 보인 것은 몇 십년 만이라고 약올리듯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본래의 색깔을 모두 잃어버린 빗속의 세도나를 보면서 실망스런 기분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오전, 비가 많이 뿌리고 있어 핑크 지프 관광을 오후 2시로 예약했습니다. 그때는 비가 그치기를 기원하면서... 대신 "성스러운 십자가 교회"(Chapel of the Holy Cross)를 방문했습니다. 파킹을 하는 순간 소낙비가 쏟아져 한 5분간 차 속에서 기다렸더니, 반갑게도 햇빛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잠시 개인 날씨 속에서 사방에 붉은 바위들이 내려다보이는 성당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정면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수백만 년의 풍화작용이 만들어 낸 신비스런 바위들의 위용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옷깃을 여미며 경건함 속에 잠기게 하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오후 2시, 감사하게도 이리저리 흩뿌리던 비가 멈추었습니다. 드디어 핑크 지프 관광이 시작되었습니다. Four-Wheel 드라이브로 울퉁불퉁 바위 산길을 곡예 하듯이 헤집고 들어가는 분홍색 지프 덕분에 일반 차도에서는 볼 수 없는 세도나 내면의 풍광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길이 아닌 길을 길처럼 달리기에 지프는 상하좌우로 요동하기 일수였지만, 그래도 함께 지프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엔 새로운 모험을 하는 기분이어서인지 웃음이 넘쳤습니다. 해롤드라는 이름의 핑크 지프의 운전자는 시종 유머를 섞어 세도나를 설명하며 승객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지프에서 내려서 평상(mesa)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붉은 바위를 보면서 해롤드에게 물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핑크 지프를 운전했어요?" "8년간 했지요" 8년 동안 하루에 한 두 번씩 (매회 2시간) 세도나의 바위산들을 운전했으니 참 이곳에 대해 다양한 경험을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세도나는 어느 때 방문하면 가장 아름다운가요?" 해롤드가 추천하는 계절에 다시 올 생각으로 질문합니다. "언제 와도 세도나는 아름답지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답변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답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도나를 잘 아는 사람만이, 그래서 세도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답이 아닐는지요?
"봄철은 이곳에 피어나는 들꽃들 때문에 아름답지요. 그리고 여름은 비 온 후, 바위산에 걸린 무지개를 볼 수 있어서 좋고.. 가을은 가을대로 단풍의 낭만이 있고... 겨울엔 이 붉은 바위들 위에 쌓인 눈들을 보는 맛이 일품이지요." 금강산이 개골산, 풍악산, 봉래산이라는 계절에 따라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도 바로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해롤드의 말처럼, 세도나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예술작품이기에 어느 계절로 옷 입혀 놓아도 그 독특한 아름다움이 돋보여 비교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가 봅니다.
"이곳을 두 번째 방문하는 내가 알고 있는 세도나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지난 8년 동안 한결같이 붉은 바위산 구석구석을 지프로 누비고 다녔을 해롤드가 아는 세도나와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나와 세도나와의 만남이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라면, 그의 세도나 체험은 깊이가 있고 다양하고 지속적이리라. 그리고 그러한 계속되는 만남 속에서 그가 세도나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과 애정, 경외감은 또 얼마나 깊이가 있겠는가? 그는 그의 세도나 체험을 통해 세도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왔으리라."
관광버스의 코스가 아닌, 내가 가고 싶었던 세도나의 이곳 저곳을, 어떤 곳은 두 번씩 다시 찾아보면서, 나는 첫번째 방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세도나의 면모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앎의 영역이 넓어져 감을 느꼈습니다. "다음 번에 다시 방문한다면, 하이킹을 하면서 이곳의 바위산과 더 깊이 있는 만남의 시간을 가지리라. 성당바위도 멀리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코밑까지 찾아가 바위 사이를 걸어보리라. 카메라도 밀어 던진 채, 그저 말없이 붉은 기암절벽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으리라. 바위들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춤을 만날 때까지..."
말씀을 안다는 것도 하나님을 알아 간다는 것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서 아는 단계가 아니라, 내가 맛보아 아는 하나님, 내가 나의 삶 속에서 직접 경험하여 아는 하나님. 하나님과의 참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려면, 핑크 지프의 운전사가 매일 매일 세도나의 깊숙한 곳을 탐사하듯이 나도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시간들을 축적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랜만에 방문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만남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맛보아 알기 위하여... "너의 하나님 이야기"가 아니라, 내게 역사하신 나의 하나님의 이야기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내 가슴속에 살아있도록 하기 위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34편 8절]
주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53신 (2004년 12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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