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쓰는 편지/영화 묵상

Wild Strawberries(들딸기)

wisdomwell 2009. 1. 14. 15:55

영혼의 죽음

-Wild Strawberries- 

 

      

 

 

 

스웨덴의 잉그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은 북유럽의 길고 어두운 겨울 탓인지 유난히도 죽음과 어둠이 느껴지는 음울하면서도 사색적인 작품들을 영상화시킨 감독으로 유명합니다.  "제 7의 봉인", "인형의 계곡", 그리고 후기 작품으로는 "Fanny and Alexander"가 그 좋은 예입니다.  그의 영화들은 인간 심층의 그늘진 부분을 섬뜩하고 사려 깊게 묘사하고 있어, 장면 장면들이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마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영화 "들딸기(Wild Strawberries)"도 바로 이런 작품으로 삶 속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밀도 높게 그리고 있습니다.  옛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는 덴버의 한 작은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가 끝났을 때 모든 관객이 그 예술성에 심취하여 박수를 보내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들딸기"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어느 오후의 도시.  50대의 한 남자가 거리를 걷고 있다.  이상하게도 도시는 온통 정적에 빠져 있었다.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거리의 상점들도 문을 열긴 열었는데 무서운 침묵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무심코 거리의 시계탑을 올려다본다.  시계탑의 초침은 정지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는 거리를 거닐며, 이 도시의 시계들이 모두 정지된 채 고정된 것을 보고 돌연 섬뜩해짐을 느낀다.  바늘 하나가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침묵의 거리.  

 

 그 때 이 깊은 정적을 깨는 무거운 소리가 들려온다.  저만치 길모퉁이를 한 대의 검은 마차가 천천히 돌아 나오고 있었다.  덜컹 덜컹.... 가까워 오는 마차를 지켜보고 있는 남자.  마차를 끄는 마부의 얼굴엔 전혀 표정이 없다.  마차 뒤에는 기다란 검은 관이 실려 있었다.  관을 실은 마차가 바로 남자의 앞을 지나고 있었다.  웬일인지 돌연 마차 바퀴가 덜커덩 요동하면서, 그 틈에 관 뚜껑이 열리고 만다.  우연히 관속을 들여다 본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친다.  그 관속에는 바로 남자 자신의 시체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산딸기"의 첫 장면은, 비록 육체의 생명은 있지만, 영혼은 차디찬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인간의 실존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또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직면케 되는 시들어 버린 나의 영혼의 현주소를 상기시켜 줍니다.  시체처럼 싸늘하게 굳어진 채 누워버린 나의 영혼과의 만남.  오랜 세월,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두어 황폐해질 때로 황폐해진 삭막한 영혼의 신음소리를 비로소 듣게 합니다.  "산딸기"의 장면들을 보면서,  밭을 일구듯이, 정원을 가꾸듯이 돌보아줄 것을 원하는 나의 영혼의 소리 없는 절규에 귀기울이라는 하나님의 경고와 만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요한계시록 3: 17]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요한계시록 3: 1]

 


                      

 

 

 - 프쉬케와 조에 -


           헬라어는 '생명'이란 말을 프쉬케와 조에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한다고 합니다. 프쉬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의 목숨,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생명을 뜻합니다.  반면, 조에는 "영생"으로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연합되어 살아가는 삶, 불멸의 생명을 뜻합니다.  현재의 생명(프쉬케)이 불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조에)이 무한히 지속될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프쉬케가 살아 있어도, 조에가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 25-26]

 

"들딸기"의 주인공처럼 육체는 살아 있으나, 그 영혼은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비록 육체의 생명인 프쉬케는 사라졌다 해도,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조에',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지금 나의 영혼의 모습은 어떠한가 생각해 봅니다. 

 

 나의 육신의 삶 속에서, 영원과 만나면서 살고 있는가?  과연 지금 영생(조에)을 맛보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영혼의 뜨락이 제멋대로 방치되어 잡초만 무성해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영혼이 시들어 가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육신의 삶이 주는 안일함에 빠져들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