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과 오스카 상
속전속결로 끝나리라던 당초의 예상을 뒤엎고, 연합군이 처음으로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던 밤, 오스카상 시상식(2003년)이 열렸습니다. 전쟁의 크고 작은 물결이 아카데미 시상식장에도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진행절차에도, 여배우들의 의상에도, 수상자들의 소감에서도 전쟁 이야기들이 끼여들곤 했습니다.
이번 시상식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에이드리안 브로디의 수상 소감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드는 경험을 통해, 전쟁이 가져오는 슬픔과 비인간화를 매우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반향(反響). 여러분들이 무엇을 믿든지 간에, 하나님이든 알라든, 그가 여러분들을 지켜주시기를, 그리고 평화롭고 조속한 종결을 위해 기도합시다. 당신과 또 당신의 아들들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브로디의 수상소감은 어눌하고 잘 정리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의 감정이 뒤섞인 연설에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를 보냄으로 동의를 표했습니다.
아마도 그가 영화에서 연기했던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이미지가 그의 호소에 더 큰 무게를 실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명분이나 겉포장은 그럴 듯 하지만, 사실 모든 국가들이 그들의 국익(國益)을 나름대로 저울질하여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고 반전(反戰)의 기치를 들기도 합니다.
라인홀트 니버가 주장했듯이,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어도 국가는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은 전쟁의 빠른 종식입니다. 가능한 한 사상자가 최소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무죄한 사람들의 피가 더 이상 그 땅을 붉게 물들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영화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에 대해 쓰지 않으면, 피아니스트가 계속 내 안에서 몸부림 칠 것입니다. "나를 해방시켜달라"고...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냉혹하게도 감정을 배제한 영화이지만,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억눌린 감정들이 그 탈출구를 찾기 위해, 관객의 가슴속에서 동분서주할 것입니다. uneasiness. 폴란스키는 관객들을 무언가 편치 않은 심정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합니다. 제가 이 영화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1939년 가을, 나치가 폴란드 바르샤바를 침공해서 1945년 1월 퇴각할 때까지 유대인들이 당해야했던 수난과 죽음의 참상들이 유대인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라우 스필만의 눈을 통해 하나하나 보여집니다. 나치의 점령 후, 그들은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삶을 옥죄이기 시작합니다.
공공 교통수단도 이용할 수 없고, 공원 사용도, 벤치에 앉는 것도 유대인에겐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푸른 별이 그려진 하얀 완장을 팔에 둘러 유대인임을 알려야 했고, 보도를 걸어 다니는 것도 금지됩니다.
멸시, 치욕, 편견, 앞날을 알 수 없는 불안. 유대인 자산의 동결과 몰수가 이어지고,
1940년에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를 만들어 모든 유대인들을 그곳으로 몰아버리고 시내 중간에 벽을 쌓아 격리해 버립니다.
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 곳에 모여 살게 되었는데 그해 10만 명이 질병, 굶주림, 무차별 총살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1942년엔 31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 곳으로부터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추방되게 됩니다.
이 영화는 폴란스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역시 일곱 살 때 어머니를 포로수용소에서 잃고 고아로 떠돌아다니며 이러한 참상들을 그가 살았던 폴란드 크라카우에서 목격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이 경험들을 영화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 영화의 촬영 장소로, 크라카우도 생각했었지만, 차마 그 곳에서는 촬영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1945년 1월, 나치의 퇴각 후에 바르샤바에는 단지 20명의 유대인만이 생존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영화의 주인공 스필만이었습니다.
스필만으로 분(扮)한 브로디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무이쉬킨 공작을 연상시킵니다. 나이브하고, 연약해 보이는 예술가입니다. 나치의 침입과 함께 시작되는 온갖 수치, 치욕, 비인간화의 참상들 앞에, 주인공은 그저 무력하게 서 있을 따름입니다.
다른 헐리우드 영화처럼, 주인공이 감정을 폭발시킨다거나 극적인 행동을 보인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절제된 언어, 억눌려져 표현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감정, 마비된 듯 뻣뻣한 몸짓. 그렇다고 그럴 듯 하게 교훈적인 이야기나, 철학적, 혹은 종교적인 코멘트도 끼어있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그저 무력한 존재로 행동하지 않는 연기를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바로 이것이 극단적인 비인간화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보편적 행동일 것입니다.
카메라는 그저 주인공이 숨어있는 작은 아파트의 창을 통해 주인공에게 보여지는 거리의 풍경들을 그대로 기록영화처럼 보여줍니다. 관객은 어느 사이에 주인공이 되어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가전을 숨을 죽이고 주시합니다.
나치의 대포가 스필만이 숨어 있는 방을 향해 불을 뿜게 되지만 그는 나갈 수 없습니다. 밖으로 그의 방문이 잠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No Way Out.
그 순간 주인공의 무력감(Helplessness)이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이(轉移)됩니다. 영화는 한 유대인 피아니스트가 본 전쟁의 참담함이 아니라, 내가 본 전쟁의 참담함으로 뒤바뀝니다.
극영화의 수법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수법을 통해서 폴란스키는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이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이 겪었던 참상, 인간이 얼마만큼 비인간화 될 수 있는지, 얼마나 그 영혼이 황폐케 될 수 있는지를 고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인공의 시선을 공유하는 경험을 통해, 전쟁이라는 비인간화의 악마 앞에서 철저하게 취약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본 후, 계속 편하지 않은 심기(心氣)도 바로 이 무력감 때문입니다.
모든 소유물을 박탈당하고 빈민촌으로 내몰리게 된 유대인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 그들에게 나치 군인들은 춤을 추라고 강요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있는 그들에게 즐거운 노래를 부르라고 윽박지릅니다. 유대인들은 군인들의 시퍼런 서슬에 놀라 즉각적으로 춤을 추고 활기찬 멜로디의 노래를 커다랗게 불러댑니다. 부적절한 감정(inappropriate affect). 감정과 표현의 어긋남.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표현도 허락되지 않는 정신분열적인 삶을 강요당합니다.
시편 137편의 포로된 조상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재현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시편 137: 1-4]
[장면 둘 - 엘리야의 까마귀들]
전쟁 전 바르샤바에 거주했던 수십만의 유대인들 중, 1945년 이 도시에 끝까지 살아남은 단 20명 가운데 스필만이 끼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아끼고 사랑해서 도와주었던 몇몇 친구들 때문이었습니다. 은신처를 비밀리에 마련해주고, 감시의 눈을 피해 살며시 빵을 가져다 준 사람들. 스필만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그들의 도움의 손길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옛날, 엘리야가 이세벨의 박해를 피해, 그릿 시냇가 은신해 있을 때, 그에게 떡을 물어다 주어 엘리야의 목숨을 부지시켜준 까마귀들이 떠오릅니다. 이들 스필만의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주신 현대판 까마귀들이었습니다.
[장면 셋 - 초토화된 거리: 아골 골짜기에서]
수개월 간 숨어 있었던 건물이 폭격에 무너져 내리고, 나치에 의해 소각되는 것을 피해 스필만은 부랴부랴,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뒤쪽 담을 뛰어넘어 도망칩니다. 카메라는 비로소 좁은 건물 안에서 벗어나, 바르샤바 거리의 전경을 보여줍니다. 모든 건물들이 폭격으로 골격만 남은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텅 비고 버려져 생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거리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황폐한 도시. 무너져 내린 건물들의 섬뜩한 얼굴들. 차갑고 삭막하게 폐허가 된 길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끝없이 펼쳐진 거리를 절뚝거리며 홀로 걸어가는 주인공의 뒷모습.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또다시 느껴지는 절망감, 무력감...
생명이 떠나간 거리의 황폐함과 정적은 전쟁으로 인해 똑같이 삭막해진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상징합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참담하게 폐허가 된 영혼의 모습이 초토화된 바르샤바 시의 모습 속에서 보여집니다. 죽음의 냄새가 깔려 있는 곳, 소망이 끊어진 곳, 생명 부재(不在)의 아골골짜기가 바로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장면 넷 - 푸른 달빛 아래 쇼팽의 발라드, 그리고 두 영혼의 만남]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빈집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결국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되는 주인공. 공포에 질린 스필만에게 나치장교는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 고 묻습니다.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거실에 놓여진 피아노를 가리키며 피아노를 쳐보라고 합니다. 폭격으로 엉망이 된 거실. 푸른 달빛이 피아노 위에 비치고 있었습니다. 스필만은 실로 오랜만에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무겁게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감, 추위와 굶주림으로 굳어진 손가락 탓에 주춤주춤 첫 소절을 치던 주인공이 일단 발동이 걸리자, 가속도가 붙듯이 점차 그 자신의 연주에 몰입되어 갑니다. 음악 속에서 그는 그의 참혹한 현실을 초월해 가고 있었습니다.
독일군 장교도 애상적인 피아노 선율이 방안을 가득 채우자, 그의 혼이 전장을 떠나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들에게로 날아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자신이 군인이기 전에 한 인간임을, 그리고 그의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저 사람이, 단지 타도해야할 유대인 중의 하나가 아니라,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또 하나의 인간임을 다시금 환기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가져온 비인간화의 폐허 속에서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그들은 한 인간과 한 인간이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마틴 부버가 말한 것처럼 "나와 그것(Ich und es)"이 아니라 "나와 너(Ich und du)"가 만나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그들 사이에 계셨습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신(神)을 상실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술을 통해 그들 사이에 계셨습니다.
쇼팽과 푸른 달빛과 두 사람의 만남...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나치 장교는, 자기 자신 속에서 움틀거리는 하나님의 영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생명이 모두 떠나간 가장 참혹한 인간 상실의 현장에서, 죽었던 인간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에스겔서의 해골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생기로 마른 뼈들이 새롭게 생명으로 태어나듯이...
그후부터 수주간, 나치가 러시아군의 입성으로 퇴각할 때까지, 우리의 피아니스트를 생존케 한 것은 바로 이 독일장교가 가져다 준 빵이었습니다. 그는 주인공에게 마지막 까마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기적을 일구어 낸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독일군 장교가 스필만을 '더러운 유대의 개'가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다시 보게 된 것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나치군인들을 일당의 악의 무리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 보게 하는 시각의 전환을 또한 가져다줍니다. 나치 군인 모두가 악의 축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따뜻한 이야기들을 지닌 하나의 인간이었음을 보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든 것은 바로 전쟁임을... 전쟁은 모두를 희생자로 만들고 있음을...
전쟁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들을, 하나의 숫자로 강등시키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침략자나 피해자 모두가 전쟁을 통해 황폐해지고, 인간성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영을 잃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안에서 이 영 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33신)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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