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쓰는 편지/영화 묵상

[아마데우스]-모차르트와 살리에리

wisdomwell 2008. 9. 1. 14:51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은혜와 율법.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은 자꾸만 율법 쪽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가만 놓아두면, 자연스럽게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수행을 잘해서 스스로 착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나의 의를 자랑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만해져서 의롭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결국 주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지곤 합니다.  아, 나는 참 곤고한 자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면 쉬울 텐데 나는 그저 나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가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주님,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통해 주님 은혜 안에 머물도록 초청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제 율법과 은혜를 묵상하면서 피터 셰이퍼의 희곡을 영화화한 "아마데우스"(감독: 밀로스 포먼, 1984년작품)를 새삼 떠올렸습니다.  아마데우스(Amadeus)는 모차르트의 중간 이름입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이름의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면, '아마(Ama: 사랑받는다)와 '데우스(Deus: 하나님)'의 합성어입니다.  둘을 합하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이 됩니다.

 

 


 켄 가이어는 그의 '영화묵상'에서 '아마데우스'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 그리고 그분이 은혜를 베푸시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질투를 그린 영화"라고 요약합니다.  모차르트와 동시대에 태어나, 활동했던 음악가 살리에리.  그는 어떻게 하나님이 나같이 성실하고 합당한 사람에게서 재능을 거두시고, 모차르트같이 오만하고 신경질적이며, 불경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부당한 사람에게 천부의 재능을 주실 수 있는가? 하는 신학적인 질문으로 갈등합니다.  어떻게 저 오만방자하고 세속적인 모차르트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아마데우스)'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나의 의(義)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못 얻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살리에리.  그는 타인에 대한 시기심과 하나님께 대한 분노를 경건함으로 포장하고 사는 전형적인 율법주의자로 등장합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은혜와 율법.  살리에리는 그의 노력과 수고로 작곡합니다.  모차르트는 하나님께로부터 타고난 재능으로, 주신 은사로 작곡합니다.  율법주의자와 은혜 속에 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습니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보기에 참 쉽게 음악을 작곡합니다.  악상이 술술 떠올라, 그대로 오선지에 옮겨 적기만 하면 됩니다.  살리에리는 곡을 작곡하려면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라기보다는 자기의 교육과 경험과 능력으로 일하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나는 이렇게 뼈빠지게 노력하는데... 저 친구는 저렇게 제멋대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모차르트에게 저런 은총을 베풀 수 있는가?"  시기심이 솟습니다.  모차르트를 정죄하게 됩니다.  곡을 만들긴 하지만, 그의 곡 속엔 생기가 없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그의 속에 깃들입니다.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나는 모차르트보다 더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  나의 의(義)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이 내게 적어도 이 정도는 해주어야 한다고 나의 의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니 불만과 원망이 그의 가슴속에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듭니다.

 

 나의 힘으로 하는 선행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하는 선행을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결국 참된 선행일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선한 일이 됩니다.  수고스럽지 않습니다.  그 멍에는 가볍고 쉽습니다.  주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힘에 의지하여 하는 착한 일이니까 힘에 부치고 어렵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주님은 당신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내 안에 일하시도록 주님께 주권을 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쉬운 주님의 멍에를 멜 수 있었으면....  은혜 안에 일할 수 있었으면... 

 

**(살리에리로 분한 F. 머레이 아브라함)

 

 

 "나에게 햄릿이나 리어왕 같은 희곡을 써 보라고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것은 셰익스피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나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삶을 보여 주면서 그런 삶을 살라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어도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재능이 내게 들어와 내 안에 거한다면 나도 그런 희곡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영이 내게 들어와 내 안에 거하신다면 그때는 나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템플]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를 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예수님이 그의 영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셔야 한다.  예수님을 우리의 본으로 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의 구주로서 그를 모셔야 한다." -존 스토트/기독교의 기본 진리-

 

 포도나무가지가 열매를 맺는 일은 간단합니다.  그냥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됩니다.  원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나뭇가지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무에 붙어 있으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무로부터 물과 영양을 공급받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억지가 없습니다.  부자연스러움이 없습니다.  쉽습니다.  내가 노력하여 하는 선행과, 주님이 은혜로 내 안에 계셔서 행케 하시는 선행은 이 포도나무 비유와도 같습니다.     
 주 안에 있어 자연스레 주님의 뜻에 나를 맡길 수 있으면, 그분의 은혜 안에 있으면, 나무에 붙은 가지처럼, 자연스레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자연스러움, 사랑, 기쁨, 섬김, 용납, 용서, 이해, 인내로 기다려줌, 따뜻함, 하나님을 찬양함, 소탈함,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내 보임, 솔직함, 겸손함, 수월하게 일함, 다른 사람을 감싸줌, 주 안에서의 참 자유. 자녀로서의 삶.  은혜 안에 사는 자가 맺는 열매입니다.

 

 반대로 율법에 얽매어 있는 자의 모습은 깊은 어둠입니다.  억지, 교만, 분노, 경직됨, 정죄함, 음울함, 구속함, 숨막히게 함, 위선, 가식, 회칠한 무덤, 가차없이 남을 비판함, 냉정함, 엄격함, 시지프스처럼 헛된 노력/수고, 자기 의를 내세움, 시기심.  내 뜻대로 나의 길을 감에도 불구하고 참 자유함이 없습니다.  전전긍긍해 하는 노예의 삶입니다.

 

 이렇듯 율법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안타깝게 은혜로 들어올 것을 부르짖습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 안에 자유인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더 이상 눈치 보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당당한 자녀임을 선포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린도후서 3장 17절]

 

 

아마데우스
감독 밀로스 포먼 (1984 / 미국)
출연 톰 헐스, F. 머레이 아브라함, 엘리자베스 베리지, 로이 도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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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영순 "새벽에 쓰는 편지" 제 64신 (2005년 11월)   지혜의 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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