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Essay/산 따라 물 따라

이튼 케년 폭포와의 만남

wisdomwell 2008. 12. 30. 17:07

 

집중 뒤에 오는 상쾌함
-이튼 케년 폭포와의 만남-
 

가을이 깊어지는 11월 하순, 패사디나 북쪽 윌튼 산 자락에 자리잡은 이튼 케년(Eaton Canyon)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산행이 나의 묵은 체증을 쓸어내리는 듯 상쾌감을 주었다.  날아갈듯 가벼운 마음이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이제야 이곳에 왔단 말인가?

 공원 입구의 네이처 센터를 지나 산책하기 좋게 잘 닦아놓은 트레일을 따라 걷는다.  처음 와보는 곳이어서, 신선한 기쁨과 함께 무엇이 전개될 것인가? 막연함 궁금함이 앞선다.  오랜 가뭄 뒤라, 그 넓은 케년의 강바닥은 물 없이 바위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길 연변엔 상수리나무, 소나무, 이름 모를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다.  여름 열기에 말라버린 풀꽃들이 바람에 서걱거린다. 

구름 낀 오후, 11월을 보내는 늦가을의 산길 풍경은 모노크롬 영화를 보는 듯 담갈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풍경들, 이 마른 풀들이 마치 내 모습 같네요.  이곳에 오면 더 우울해질까봐 그 동안 안 왔던 거예요."  기분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임에도, 순간순간 우울의 깊은 늪이 S를 잡아당기고 있는 듯했다.  

 


 

 

 "비가 오고 봄이 오면, 다시 이 풀들이 꽃을 피우고 생생한 초록색으로 되살아나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 곳의 봄의 풍광이 내 마음속에 그려지며, 나는 동시에 두 계절을 보는 기쁨을 누린다. 

우기(雨期)가 와서 비만 한 번 오면, 저 계곡엔 물 흐르는 소리가 노래하듯 들리리라.  지금은 메말라 있지만, 시냇물 소리도 들리는 싶었다.

 

 

 

 

 

 

 

 봄의 생동하는 아름다움도 좋지만, 늦가을의 정취가 배어있는 산과 계곡의 쓸쓸한 아름다움도 나는 좋다. 

길가에 가지들을 늘어뜨린 채 운치 있게 서 있는 나무들이 정겹다.  

 

 

 

 

 

 1마일 가량, 평평하게 닦아놓은 산책로를 걸어 두 언덕을 연결하는 다리 밑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산 속 폭포로 접어드는 이렇다할 길이 없는 길이다. 

 

"지금부터는 내가 갈 길을 만들며 가야 해요."  S의 말이 인상깊게 다가온다.  그렇지, 내가 만들며 가는 길...  바위 위를 건너 짚으며 스스로의 길을 만든다.

 

계곡엔 수량(水量)이 많지는 않았지만, 반갑게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케년인지라, 눈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우뚝 선 산 봉오리들이 우리를 감싸 안는다. 

 

갑자기 도시를 멀리 떠나 아주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제나, 저 제나 폭포가 나오려나? 기대에 차서 발을 디딜만한 바위를 골라가며 골짜기 계곡 길을 오른다. 

가던 계곡길이 돌연 180도로 회전한 곳에 이튼 케년의 폭포가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었다. 

 

 

 

 

 

 

 

폭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이 가운데만 올려다 보이는

골짜기에 있었다. 

그래서 불과 1.5마일만 걸어나가면 도로와 만나진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동행한 S의 말대로 이 폭포는 희방폭포를 많이 닮았다. 

 

내 젊은 날의 어느 가을날, 마지막 가는 대학시절을 아쉬워하며 친구들과 함께 찾았던 소백산 산 속의 희방폭포가 이튼 폭포의 새하얗게 부서지는 물줄기 위에 오버 랩 된다.

 

 

 

 

 

 

 

 

 

 

 

 

 

 

 

 

 

 

거대한 물줄기가 짙은 녹색의 담(潭)으로 쏟아져 내린다. 

물을 받아 안는 담도 제법 넓어 수영을 해도 될 정도였다. 

발을 물 속에 담갔더니 곧 시려온다.  
 

 

 

 

 

 

 

 

 

 

 

 

 

 

 

 

물을 담은 담이 짙은 초록색으로 그 깊이를 알기 어려웠다. 

지난 6개월 남짓,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고, 예년의 가을 날씨와는 사뭇 다르게,

낮에는 아직도 더위가 가시지 않은 건조하고 가문 날씨인데 이렇게 많은 물들이 떨어져 커다란 담을 이루고 있다니... 

 

 

 

 

지난 시월 요세미테 폭포에 갔을 때, 가뭄으로 물 한 줄기 흘러내리지 않는 바위 절벽만을 보고 온 뒤여서, 이렇게 많은 물줄기가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시원스럽게 물이 떨어져 내리는 것일까? 

 

아래 계곡엔 시내 바닥이 말라 바위들만 나뒹굴고 있었는데,

도대체 이 물들이 어디서 나왔단 말이냐? 

 

바위 속을 뚫고 나왔나?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져 내렸나? 

 

 

 

 

 

 

 

 

폭포 위쪽이 궁금한데 눈앞엔 우람한 절벽뿐 그리로 가는 길은 없다.  우기가 오고 연일 비가 온 후에, 이곳을 찾는다면 어떨까? 

 

계곡마다 물이 좔좔 흘러, 어쩌면, 폭포까지 올라오는 길이 막혀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폭포물 소리를 이겨가며 서로를 위해 기도를 하고 "할렐루야, Praise the Lord!"를 외쳐본다.  가슴속에 남아있던 지친 삶의 앙금들을 폭포물 소리보다 드높은 찬양으로 후련하게 씻어낸다.  S의 고조된 기분이 내게도 전염이 되는 듯 활기가 솟는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S와의 만남을 새삼 감사하게 된다. 

 

 


 

이튼 케년, 지금 생각하면 산행이랄 것도 없을 정도인 1.5 마일의 가까운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속의 비경을 만난 듯한 느낌에 가슴 설레는 것은 바로 이튼 케년 끝에 폭포 때문이리라. 

이곳을 알게 된 것이 모래 속에서 귀한 보석을 발견한 듯 뿌듯하다.


 왜 이 산행이 나를 즐겁게 했을까?  처음 가보는 곳이었기 때문에?  기대를 넘어서는 수려함 때문에?  오랜만에 산을 올라간 기쁨 때문에? 

모든 것이 합해져서 온 즐거움이리라.. 

 

 

그런데 나는 그것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집중할 수 있었던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집중.  마지막 0.5마일은 시냇물 사이사이로 바위들이 울퉁불퉁 놓여있는 계곡이었기에, 바윗돌을 골라가며 조심스레 징검다리 건너듯 올라가야 했다. 

발을 헛디디지 않고 길을 잘 만들어 가며 걷는 길이었기에 나의 몸과 마음, 힘과 뜻이 모두 산행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오로지 한가지 일뿐이었다.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는 일.  내 맘과 정성 다해 폭포를 향한 일념만을 가지고 걸었다. 조금도 생각이 나뉠 수가 없었다.  생각을 흐트러트리면,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험한 길은 집중을 자연스레 요청했고, 나의 기쁨은 바로 이 집중 뒤에 오는 것임을 알았다. 

 

 
 자전거의 흐트러진 살들이 중심의 축으로 모여들듯, 나는 오직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집중의 시간들이 가져다준 그 상쾌함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반면 산만한 마음은 우리를 피곤케 한다.  지치고 권태스럽게 한다.  휴일을 보낸 다음에 오히려 더 피곤함을 느끼는 것도 긴장을 푼 산만함 때문이리라.  

 

 

 등산가들이 로프를 타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발 하나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데 어떻게 집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에겐 오직 한 발 한 발 잘 디뎌 목적한 바위 꼭대기에 오르고 또 다시 안전한 곳에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다른 것은 없다.  그것 말고는 그 순간 그들이 생각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리라.  이 무서운 집중이 있었기에, 바로 이러한 집중 뒤에 그들이 느끼는 희열 또한 큰 것이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장 4, 5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한 것도 이러한 집중이었다. 

우리 삶이 '중심의 축'되신 하나님께만 집중하기를 명하신다. 

이것저것 양다리 걸치는 삶.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세속적인 가치관에 이끌려 사는 것을 하나님은 영적 간음이라고 무섭게 책망하셨다. 

 

언제까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망설이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엘리야 선지자는 부르짖는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열왕기상 18장 21절]

 

 

 

 

 

 

 

확실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 망설이고만 있을 때 나는 산만해지고 피로해지고 지쳐버린다. 

이러한 산만함은 나의 영혼을 병들고 파리하게 한다.  그러나, 나의 중심의 축이 확고하게 하나님께로 고정되어 있을 때, 내 삶에는 질서가 있다. 

하나님께 집중할 때 오는 상쾌감.  시원함....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집중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셨나 보다.

 


 

 예수님은 당신을 대접하기 위해 이것저것으로 분주하고 산만해진 마르다에게 말씀하신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Only one thing is needed.).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리아는 예수님 들려주시는 말씀 한 가지에만 집중한다.  그녀는 알았다.  말씀이 확고하게 그녀 중심의 축이 되어 그녀의 삶을 다스릴 때, 그녀의 일상이, 그녀의 인간관계가, 중심의 축이 고정된 수레바퀴처럼 아름답고 유연하게 돌아갈 수 있음을....

 


 험한 산행을 할 때, 오직 발을 디디는 데만 집중하듯이,

주님께 센터링하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 영혼의 시원함을, 상쾌함을 가져다 줄 것이기에.

 


 

 

 "그런즉 너희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 전서 10장 31절]
 "매일의 일상 생활, 잠자는 것, 먹는 것, 일하러 가는 것, 그리고 걸어다니는 것 모두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라." [로마서 12장 1절, The Message]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글: 2007년 12월 (새벽에 쓰는 편지 제 77신), 사진: 2008년 1월, Eaton Canyon (Pasadenat, California) 에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