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 겨울 호수 - 록키 마운튼에서
"주님, 주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시편 104편 24절/표준번역]
추수감사절 다음날, 록키 마운튼 국립공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침에 몸이 불편하시다고 그저 누워 있기만을 원하셨지만, 아침 식사 후 조금 기분이 좋아지시고, 모두들 권해서 함께 모시고 갈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덴버 시내를 벗어나 볼다로 향하는 36번 하이웨이로 들어서면서부터 저의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했습니다. 낯익은 콜로라도 주립대학 뒤편 산의 모습이 정겹게 눈에 들어옵니다.
하이웨이가 끝나고 록키 마운튼 국립공원 초입에 있는 에스테스 파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구불구불 골짜기를 옆에 낀 산길을 달려가면서, 저는 벌써부터 나무들과 구름과 눈부시게 청명한 초겨울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후련해져오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의 세포가 있다면, 그 세포 하나하나가 그 동안 쌓였었던 두터운 먼지를 털고 샤워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스테스 파크의 한 모텔을 얻어 어머니와 올케 언니를 그곳에 쉬게 하고, 오빠와 저는 겨울산행을 위해 국립공원 안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오늘의 목적지인 베어 레이크를 향해 산길을 달려 올라갔습니다. 길 연변의 초원들은 누렇게 겨울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소나무, 가문비나무들의 침엽수림은 예전 그대로의 검푸른 아름다움으로 청청하게 빛났습니다.
록키 산맥의 연봉들은 흰눈을 쓴 채, 차가 산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 장엄한 모습으로 압도하듯이 눈 앞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 멋진 봉우리들.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난 듯 반가움이 앞섰습니다.
베어 레이크 로드 초입에 있는 모레인 캠프 그라운드에 들렀습니다.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한 가운데 널찍하게 펼쳐진 초원에 캠프장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오빠, 언니는 주로 캠핑을 하곤 하는데, 한 번은 아침에 눈을 떠보니 수 백 마리의 엘크 떼가 눈앞에 펼쳐진 초원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그리고 이 산 속에서 보이는 별들의 모습은 또 어떨 것인가? 하늘 가득 쏟아져 내릴 듯, 박혀 있을 별들. 밤이면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까?
베어 레이크 로드 연변엔 검푸른 소나무, 전나무들이 흰 눈 밭 위에 기품있게 서 있었습니다. 가을날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였을 아스핀 나무들도 그 잎들을 모두 벗어 버린 채 빽빽하게 나목이 되어 길가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겨울 속에서 가을날, 아스핀 나무숲의 황금빛 영광을 마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공기는 청명하고, 하늘은 새파란 물이 들 것처럼 티없이 짙은 청색으로 빛났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시편 104편 1, 2절]
맑은 겨울날의 태양빛이 산봉우리와 삼림과 구름과 길을 충만하게 덮고 있었습니다. 빛이 곳곳에 퍼지듯 이 자연 구석구석에 하나님 창조의 손길이 깃들여 있었습니다.
나무 위에 눈은 녹아 없어졌지만, 도로를 제외한 산은 온통 눈밭이었습니다. 드디어 베어 레이크, 나의 추억 속에 살아있던 호수에 도달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쳤습니다. 털모자를 쓰고, 그 위에 또 파카에 달린 모자까지 뒤집어썼습니다. 신고 있는 운동화로는 눈 쌓인 록키 마운튼을 하이킹하기엔 역부족인지라 발에 철사줄로 만든 신을 덧신었습니다. 그리고 스키하는 사람들처럼 양 손에 폴을 얻어들었습니다. 오빠는 어느덧 칠십이 넘었지만, 하이킹을 좋아하다 보니 어느새 등반의 준 전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베어 레이크를 끼고 한 바퀴 도는 코스(0.5마일)를 필두로 하이킹을 시작했습니다. 베어 레이크는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사람들이 호수 한 가운데로 들어가 호수 뒤쪽의 우람한 할렛 봉우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호수와 오솔길과 주변 산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호수 연변의 트레일은 쌓인 눈이 다져져 미끄러웠습니다.
베어 레이크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이름도 낭만적인 님프 레이크, 드림 레이크를 거쳐 에메랄드 레이크에 이르게 됩니다. 워낙 늦은 시간에 출발했기에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가파른 하이킹 코스로 접어들었습니다. 눈길이어서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겨울 눈길 산행은 1970년대 중반, 치악산에 갔던 것을 빼고는 전무한 까닭에 한 발짝 한 발짝이 조심스러웠습니다. 가파른 산길이어서 숨이 턱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산행이 즐거웠습니다. 산을 오르기가 힘들어서인지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온몸에서 훈훈한 기운이 올라왔습니다.
산이 오랜 친구처럼 정답게 느껴집니다. 약 20년 전쯤 (덴버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눈이 부시게 청명한 가을날, 아스핀 단풍이 한창인 베어 레이크가 보고 싶어 충동적으로 혼자 이곳을 찾아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베어 레이크에서 에메랄드 호수에 이르는 바로 이 길을 걸었었습니다. 아스핀 노란 잎사귀들 사이로 내려다보이던 에메랄드 레이크의 쪽빛 수면과 소나무, 가문비나무들의 짙은 녹색, 그리고 새파란 하늘빛이 어우러져 환상적이었던 풍경이 지금도 제 기억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고혹적으로 아름답던 선경을 혼자 보고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외로웠었던 느낌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입니다. 이 산 속의 겨울 호수들은 가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다가옵니다. 얼어붙은 님프 레이크. 얼음판이 된 호수 위에 잔설이 흩날립니다. 꽁꽁 얼어버린 알파인 호수를 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어서 싱그럽고 즐겁습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조금 전 그 빙판 위를 걸었었던 님프 레이크가 눈 아래 내려 깔립니다. 소나무 숲에 둘러 쌓인 동그란 원형의 호수가 하얀 동전처럼 내려다보입니다.
산을 오르면서, 중간 중간, 겨울 산과 호수를 렌즈에 담았습니다. 록키산맥 고산의 호수들을 나의 컴퓨터 속에 넣어 두고 생각날 때마다, 불러내리라. 친구의 사진을 보듯이 보고 또 보리라. 겨울의 산 내음, 얼음 호수의 싱그러움, 찬 바람의 감촉을 다시금 되살리리라.
한 걸음 한 걸음 저로서는 인고(忍苦)의 걸음들을 내딛으며 드디어 드림 레이크, 꿈꾸는 호수에 도달했습니다. 그 높은 산 속에 길게 누워있는 호수. 하얗게 눈 덮인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한 알파인 호수와 호숫가의 검푸른 침엽수림과 바위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사랑스런 호수. 아직 오후 세 시임에도 불구하고 겨울 산엔 어느새 푸르른 어스름 빛이 감돌았습니다.
드림 레이크, 그 커다란 고산의 호수가 온통 얼어붙어 거대한 스케이트장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호수 위 빙판을 걸어 호수 가운데 바위 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습니다. 가져온 샌드위치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바람에 손끝이 시려왔고 물병의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평소 싫어하는 샌드위치를 차가운 물과 함께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에메랄드 레이크까지는 0.8 마일, 겨울 산 속이어서 어둠이 빨리 내릴 것 같아,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산 길은 조심스럽긴 했지만, 숨이 차지 않아 빨랐습니다.
소나무 숲 속 눈 덮인 오솔길이 호젓했습니다.
베어 레이크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와, 차로 산길을 내려오다가, 그 도중에 위치해 있는 스프레이그 레이크에 들렀습니다. 고도가 낮아서인지, 호수가 꽁꽁 얼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호수 가장자리는 살얼음과 물이 춤추듯 서로 교감하고 있었습니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들이 호수 주변을 감싸안고 있는 까닭에 그 어떤 호수보다도 주변의 경관이 빼어났습니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데 0.5 마일. 호수를 돌면서,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산봉우리들을 보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겨울 산행. 눈 덮인 산을 오르면서 오직 나의 관심은 산을 오르는 데만 있었습니다. 겨울 산은 그 위험도 때문에 자연스럽게 집중을 요청했고, 이러한 총 집중 때문이었는지 마음이 기쁨으로 차 올랐습니다. 집중 후에 오는 놀라운 상쾌함. 아름다운 경치, 깨끗한 공기, 청명한 햇빛, 적당한 운동. 그리고 이 겨울 산 속에 퍼져있는 하나님의 다감한 손길이 충만한 기쁨으로 나의 지쳤던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체험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에스테스 파크, 모텔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닌 듯한 생동감과, 활력, 싱그러움으로 차 있음을 감지(感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의 손길이 담긴 자연을 통해 치유의 능력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추운 마음을 덮어 주시는 따뜻한 이불일 수 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다." -게리 토마스/영성에도 색깔이 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65신 (2005년 11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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