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쓰는 편지/새벽을 깨우는 음성

엉뚱한 소원 vs. 바른 소원

wisdomwell 2008. 6. 19. 15:43

"세 가지 소원(Three Wishes)"이라는 우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천사가 가난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농부에게 세 가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다음 일요일 아침 8시부터, 처음으로 말해지는 세 가지 소원이 그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고 떠나갑니다.  천사가 사라진 후, 농부와 그 아내는 무슨 소원을 말할까? 흥분으로 들뜬 날들을 보냈습니다. 
 드디어 고대하던 일요일 아침, 농부의 아내가 아침을 준비하려고 부엌에 들어갔습니다.  있을 줄 알았던 소시지가 다 떨어진 것을 보자, 아내는 부지(不知)중에, "소시지가 다 떨어졌네.  소시지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프라이팬 위에 먹음직한 소시지가 떨어져 내렸습니다. 

아뿔싸!, 이것을 본 농부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소리쳤습니다.   "아니, 이 마누라가?  그 귀한 소원을 이런 식으로 허비해 버리다니.  멍텅구리 같으니..  저놈의 소시지, 마누라 콧잔등에나 붙어 버려라."  그러자 소시지가 아내의 콧잔등에 붙어 버렸습니다. 

 

 

이제 소원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보, 소시지를 코에 붙이고 살 순 없잖아요!"  부인이 울부짖자 남편은 할 수 없이 "소시지를 코에서 떨어지게 해 주십시오"하고 마지막 소원을 말했습니다.  결국 세 가지 소원으로 얻은 것은 소시지 한 개였습니다.  두 부부는 소시지를 그날 아침으로 먹었습니다.

 

 

 

만일 천사가 와서 당신에게 세 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면, 어떤 소원을 말하시렵니까?  그리고 왜 그것들을 원하십니까? 

사람들이 적어놓은 소원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또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으며,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주님께 간구하여 치유 받는 이야기를 묵상합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가 길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소리질러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위 사람들의 조용하라는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체면도 창피함도 생각지 않고 큰 소리로 고함질러 예수의 관심을 그에게로 고정시킵니다. 

주께서 그를 부르실 때까지, 그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끈기 있게 예수를 부릅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고 명하시니 소경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내쳐 달려 나아갑니다. 

당신 앞에 선 소경 바디매오를 향해 주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Rabbi, I want to see."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마가복음 10장 51-52]

 

 

 주님은 오늘도 내게 말씀하십니다.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처럼, 즉각적으로 대답할 확실한 나의 소원이 있습니까?

내가 내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습니까?  주위 사람들의 핀잔과 부정적인 견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수치심,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리높이 외쳐 주님의 도움을 구할 나의 소원, 나의 목표가 있습니까?  주님 없이는 이룰 수 없는 내 삶의 절박한 원의(願意)가 있습니까?

 

 바디매오는 예수께 즉각적으로 답했습니다.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당신을 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원합니다!" 

소경은 그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그를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나를 묶고 있는 사슬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바른 소원을 주님께 아뢸 수 있을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인 AA 모임에서 12단계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그 첫 번째 단계가 "나는 알코올 중독자 입니다.  내 힘으로는 이 중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고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바디매오처럼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반면, 술 때문에 자신의 일과 가정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분들이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술을 끊을 수 있어" 장담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부인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바른 소원을 주님께 아뢸 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치유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바디매오의 기사 바로 직전에 나오는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께 아뢴 소원은 거지 바디매오의 소원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의 수제자들이었던 이들은 엉뚱하게도 주님이 영광 가운데 있게 되면, 그 우편과 좌편 영광의 자리에 자신들이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고 답하시며 당신이 당하실 고난을 얘기해 주십니다. 

3년 동안 예수와 함께 기거했으면서도, 지금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신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빗나간 소원을 말하니 주님이 얼마나 안타깝고 실망스러우셨을까요? 

 

 제자들의 소원은 그들이 아직까지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 지를, 또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세속적인 욕심과 명예욕이 그들의 눈을 가려 예수가 누구이신 지를 볼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들의 구하는 것을 들어주실 수 없으셨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그의 소원을 간구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치유를 경험케 되는 것과는 대조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한 나는 "바른 소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성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나의 참 정체성(Identity)을 믿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바른 소원, 바른 삶의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다시 보게 된 바디매오는 그 길로 예수를 따르기로 선택합니다.  예수가 누구이신지 몰랐을 때, 그에게는 삶의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디매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는 삶의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로 향하는 예루살렘 고난의 길을 따라 나섭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는 목표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소원과 일치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이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44신 (2004년 3월)

 

'새벽에 쓰는 편지 > 새벽을 깨우는 음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을 만들어 주는 일  (0) 2008.09.08
초대받지 않은 손님  (0) 2008.09.07
하나님의 그림을 보는 눈  (0) 2008.05.22
하나님의 음성 듣기  (0) 2008.05.09
주님은 나의 최고봉  (0) 2008.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