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소리 처럼, 계곡의 물소리처럼-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인도하는 대로 사는 삶을 갈망할 것입니다. 지난 3월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며
특히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우리 주님의 음성을 묘사한 대목들이었습니다.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계시록 1: 10]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요한계시록 1: 15]
His voice was like the sound of rushing waters...
바위들 틈을 돌진하며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의 물소리.. 나의 기억은 어느 틈에 나를 1977년의 내설악, 백담사 계곡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백담사 계곡은 참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숙소였던 백담산장에서 한 20여분 계곡을 따라 혼자 걷다가, 시냇물과 바위가 너무 아름답고 깨끗해 그 곳 바위 위에 누웠습니다. 햇볕에 데워져 따뜻한 바위, 서정주 시인의 시귀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 조각 구름들... 그리고 그 백담의 물소리.. 한동안 눈을 감고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만을 듣고 있었습니다. 우렁차면서도 리드미컬한 물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바로크 음악처럼 정형(定型)성을 지닌 물소리... 나의 모든 것이 오로지 청각에만 집중되었었습니다.
쾌적함, 평안함, 그렇게 마음이 평화로울 수 없었습니다. 복음성가의 가사대로 "강(江) 같은 평화"였습니다. 때로는 기쁨에 찬 큰 목소리로, 또 어느 순간엔 속삭이듯 다정스런 목소리로 바뀌며 즐겁게 흘러가던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 그곳에 계셨던 하나님. 물소리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셨음을 압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사도 요한이 들었던 주님 음성은 밤하늘을 가르는 트럼펫 소리 같았고, 많은 물이 돌진하며 흘러가는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처럼 우렁차고 커다란 음성이었습니다. 일깨우는 소리였습니다.
** 사무엘과 하나님 음성 **
어린 사무엘이 처음으로 하나님 음성을 들었을 때, 삶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그는 그 음성을 엘리 제사장의 것으로 오인하고 세 번씩이나 엘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나의 지난 세월들 속에서 하나님은 숱하게 나를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의 음성을 그 분의 것으로 듣지 못하고 사무엘 처럼 지나쳐 버리는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쓸데없이 분망하고 허망한 것들을 추구하느라 산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향해 내 마음을 모으질 못했습니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이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똑같은 강도(强度)를 가지고 여과없이 들이닥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선별하여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숱한 소리들의 홍수 때문에 집중하여 대화할 수 없는 것이 분열증세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소리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곧잘 놓쳐버리고마는 나는 영적(靈的)인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엘리야와 하나님 음성 **
엘리야 선지자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 속에서도 아니었고, 지진 가운데서도 아니었고, 불 가운데서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간 후 적막함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조용하고 온화한 속삭이는 듯한 음성.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내 마음의 수면(水面)을 고요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미명의 시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가장 좋은 시간임을 말씀 묵상을 하면서 더욱 더 실감하게 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 35]
일어나기 싫어 침대에서 미적대다가도, 문득 이 성경구절이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 고요함 속에서 말씀과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 요한과 하나님 음성 **
그런데 계시록의 사도요한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트럼펫처럼, 계곡의 많은 물처럼 그렇게 크고 우렁찬 소리였습니다. 왜 이 늙은 사도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하고 조용한 음성이 아니었을까? 육신의 청력(聽力)은 세월과 함께 쇠퇴해 갔지만, 그 영혼의 청력은 점점 밝아져, 특별히 귀기울이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크고 선명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일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왔던 그의 연륜이 그에게 이 세상의 잡다한 소리들을 여과해내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만을 선택하여 들을 수 있는 초성능 안테나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닐까? 자기 아기의 울음소리만을 선택하여 들을 수 있는 아기 엄마의 귀처럼, 요한의 귀도 하나님 음성에 그만큼 민감하게 다이얼을 맞춰 놓고 살았던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요한 계시록은 요한이 노구(老軀)의 몸을 이끌고 밧모섬에 유배된 상황에서 보았던 계시를 쓴 책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듣고 보면서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그의 눈과 귀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의 고통이, 성도들의 수난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곤두세우게 했습니다. 그가 나팔소리 같은 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이러한 고통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고난은 영적으로 귀머거리인 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거룩한 확성기"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때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고통을 만나면 비로소 들려 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며 그에게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자들에게 고통은 결국 축복으로 가는 통로가 됩니다. 덜 중요한 것들(물질, 건강, 명예 등등)을 잃는 고통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분, 영원한 가치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지금 나의 주위에서 나팔소리처럼, 계곡을 돌진해 흘러내리는 많은 물처럼 크게 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들을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들에 다이얼을 맞춰 놓고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불평하곤 합니다. "왜 하나님, 내게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까?"
아침이 밝아옵니다. 비가 개이고 오랜만에 보이는 푸른 하늘이 반갑습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작은 새들의 지저귀는 노랫소리가 마냥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새들의 지저귐 속에 당신의 음성을 숨겨 놓으셨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10신 (2001년 5월)
사진: 2004년 5월 설악산 주전골, 소금강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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