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이 담긴 여행/성지순례: Egypt·Jordan·Lebanon

[요르단 4] 대지와 사귀라 -광야 체험/ 사막의 밤

wisdomwell 2008. 1. 23. 14:59

 "광야는 하나님이 극대화되고 사람이 극소화되는 곳이다.  도시는 사람이 극대화되고 하나님이 극소화되는 곳이다."

 

 

 

대지와 사귀라 -광야 체험

 

 와디 럼 주변, 허허로운 벌판에 있는 캠프장 텐트에서 광야 체험의 밤을 맞기로 한다.  거침없이 펼쳐진 거대한 광야.  그리고 듬성듬성 우뚝 솟은 바위산들.  캠프장엔 조그만 2인용 하얀 텐트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숙소로 정해진 텐트의 입구 장막을 들치니 두 개의 작은 매트리스가 양편에 놓여 있다.  여행가방을 텐트 속에 밀어 넣는다. 

 


 

 저녁 7시 반, 식사시간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다.  가이드 이집사님의 안내로 우리는 광야로 걸어 나간다.  메마름으로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땅이 눈에 들어온다.  광야 한 가운데 둥글게 둘러앉는다.  "모두들 땅 위에 누워보세요.  조용히 광야를 묵상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알고 스스로의 가치를 인식하기 위하여서는 대지와 사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대지와 밀접하고도 감각적인 접촉을 갖고 있는 한 무적의 존재가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길가의 바위들에 걸터앉으니 울퉁불퉁하며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 온몸에 퍼지며 이 산 전체에 대한 나와의 관계는 일변했다.  바위를 만지면서 산과 나는 서로 마음을 통한 것이었다." -챨스 A. 린드버그/대지와 사귀라-

 

광활한 사막의 저녁 하늘을 이불 삼아 광야에 눕는다.  아 왜 이리 편안한가?  갈라진 땅, 굳은 땅이어서 딱딱할 줄 알았는데 신기할 정도로 너무도 편하다.  울퉁불퉁 등에 배기리라 생각했는데 그 어느 침대보다도 편안하다.  언제 이렇게 대지 위에 한가롭게 누웠었던가?  수십 년 전 진달래꽃 붉게 핀 어느 날, 대학 총장공관 잔디 위에 누웠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도 편안했다..  돗자리 깔고 집 잔디 위에 누워 별을 보기도 했지..  이대 뒷산에서 이효석의 소설 산을 생각하며 그 산에 눕기도 했었다.  이상하게 대지 위에 누우면 그리도 편할 수가 없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대지가 나를 그대로 안아주는 것 같다.  그 품이 그리도 편할 수가 없다.  


 

너무 편하니 누운 지 5분도 된 것 같지 않은데 일행 중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광야가 그리도 편안했다는 증거가 아닐지..  그 어느 침상보다도..  그 어느 푹신한 이불보다도...  대지는 우리를 품에 안아준다.  어머니처럼...  바로 옆에 있는 이가 코를 고는 줄 알았는데, 그도 누군가 코를 골았다고 나중에 이야기한다.  아마도 땅에 누우니 그 땅을 통해 코고는 소리가 바로 옆의 사람의 것인 듯 가까이 들렸나 보다.  미세한 소리까지도 이 광야에선 들릴 것 같다.  땅을 타고...  바람을 타고....  

 아무 것도 깔지 않고 그대로 땅바닥에 누웠는데도 거리낌이 없다.  광야는 청결하다.  바람이 늘 청소해주어서인가?  공해가 없어서인가?  하나님이 바람이라는 커다란 비를 들고 늘 깨끗이 쓸어주시는 때문인가?  너무도 깨끗하고 편한 자리다.

 

"나는 새로운 자각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은 인생의 위대한 속성은 대지와의 밀접한 접촉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그런 자각이다.  나는 이 접촉을 유지할 수 없는 한 문명은 멸망하고야 만다고 확신한다."   -챨스 A. 린드버그/대지와 사귀라-

 

 

사막의 밤하늘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8장 3,4절]


 

 

 대지에 누워 저녁이 내리는 하늘을 본다.  어스름 저녁빛이 짙어지자 하늘에 하나 둘, 별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어둠과 함께 더 많은 별들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사막에서 보는 하늘의 별.  얼마나 소망해 왔던 일인가?   

 아브라함은 자식도 없이 속절없이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처량해하며 별이 돋는 사막의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저 하늘에 별을 보라..  저 많은 별들을 셀 수 있겠나?  모래들은 어떤가?  모래들을 셀 수 있겠나 보라.  저 별처럼, 또 이 모래알처럼 많은 자녀를 네게 주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고독의 광야 속에 나타나 그에게 속삭이셨다.  

 야곱도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 첫날밤, 광야에서 돌베개 한 채 하늘을 보고 누웠었다.  외로움과 두려움이 그를 엄습한 그 광야의 밤, 반짝이는 별빛을 그의 눈물 속에 담고 잠이 든 그에게 오셔서 하나님은 그의 적막 속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광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미드바르'입니다.  이 단어는 '말하다'라는 뜻인 '다바르'에서 나왔습니다.  이러한 어근에 비춰볼 때,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그분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찰스 스윈돌/지혜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 잘 들린다.  사람들이 없기에, 문명의 이기가 없기에, 나의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없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더 명확하다.  나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기에 속삭이시는 그분의 세미한 음성까지 여과됨 없이 들려온다.  유대인에게 광야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곳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광야의 그 광대한 침묵 속에서 말씀하신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시편 19장 1-4절)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광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곳이다.  하나님 앞에서라야,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겠기 때문이다.  아기의 존재는 아버지가 있음으로 해서 그가 누구인가가 결정되듯이 나는 하나님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곧 참 나와의 만남이기도 하기에....  하나님을 그 어느 곳보다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광야는 참 나를 발견하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별.. 별... 별.. 사막의 하늘은 땅과 맞닿았기에 이곳에서 보는 별들은 유난히 가깝다.  별들을 보면 창조주를 생각 안 하려야 안 할 재주가 없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이 별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고, 이런 광야의 고독 속에서 믿음을 키워가지 않았던가?


 별을 아주 가깝게 볼 수 있는 곳, 그 곳이 사막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그 어느 때 보다도 가깝게 느껴질 때는, 바로 우리가 인생의 광야, 삶의 사막 가운데 서 있을 때가 아닐까?


 "광야는 하나님이 극대화되고 사람이 극소화되는 곳이다.  도시는 사람이 극대화되고 하나님이 극소화되는 곳이다." 문득 신문에서 읽었던 어느 선교사님의 말이 생각난다.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72신(2006년 7월)에서

사진: 2006년 3월, 어둠이 내려앉는 광야에서 (요르단 와디럼 부근의 캠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