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함"이란 이름의 우상
"공평함 Fairness"은 우상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공평함은 우상입니다. 공평함"이란 가치관 위에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신'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이 원하는 신은 바로 그런 신입니다. '인과응보의 신',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신'. Fair한 신, 공평해 보이는 신. 착한 일 한 사람에게 상주고, 나쁜 일 한 사람에겐 벌주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나게 하는 신. 단순논리입니다. 단순해서 이해하기 쉽고, 혼동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합(合)합니다.
내가 만든 상자 속에 꼭 들어오는 신(神), "공평함"이라는 이름의 신입니다.
결국 내가 잘하면 보상이 오고, 내가 못하면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니, 모든 것이 나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신이라면, 그렇다면 신의 존재는 과연 무엇입니까? 자동판매기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공평함"이란 나의 우상이 생각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나는 사춘기의 청소년처럼 불평하고 항의합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욥기 21장 7,9절]
욥이 영적으로 고통스러웠던 것도 그의 "공평함의 신관"이 그가 당한 재난의 참혹함 속에서 무너져 내림을 본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기존의 "공평의 신"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는 커다란 혼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욥이 그랬듯이 나도, 무죄(?)한 자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의인이 잘 되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나는 분개합니다. 고통 앞에 "왜 나지요? Why Me?"를 외칩니다. 욥처럼, 내가 죄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만한 고통을 당할 만큼 악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억울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엔 '인과응보의 신관'이 은연중에 깔려 있음을 봅니다.
인과응보의 신관이 우상인 것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사람과 사람 끼리를 비교하며 악인과 선인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입니다. 전통과 문화, 법과 윤리, 그 시대가 심어 놓은 양심의 범주 속에서 선악이 판단되는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인 세계관이 그 근저(根 )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성서는 과감하게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죄인으로 선포합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남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존재라고 단언합니다. 인간과 인간 끼리의 상대적인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單獨者)로서의 나의 모습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이십니다. 절대적인 선(善) 앞에서 인간은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죄성을 타고난 죄인들입니다. 자기중심성(自己中心性), 이기심이라는 죄성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죄인들입니다.
그 옛날,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였던 베드로가, 그에게 만선(滿船)의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님 앞에서 처음으로 고백한 말은 바로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였습니다. 절대자 앞에 섰을 때, 인간이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일 것입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내려다본 사람들의 모습. 도토리 키재기 아닐는지요. 크면 얼마나 크고 작으면 얼마나 작습니까?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이란 결국 도토리 키재기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선하면 과연 얼마나 저 사람보다 선하단 말입니까? 그저 똑 같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설 뿐입니다. 내가 의로운 사람인데 왜 고통이 와야 하느냐? 어찌 감히 따질 수 있겠습니까? 같은 맥락으로, 저 사람이 고통 당하니, 그 죄의 결과를 받는 것이라고 어찌 감히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해(不可解)한 고통.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主權)아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통은 신비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판단 영역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영역에 있습니다.
삼풍상가처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장 4,5절].
재난 당한 이들을 은근히 정죄하는 사람들도 똑 같은 죄인임을 주지시켜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에, 우리에겐 우리의 죄를 용서해줄 은혜가 간절히 요청됩니다. 인간의 "공평함"은 선한 자에게는 햇빛을, 악한 자에게는 어둠을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인간적인 기준의 의인,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그 분 앞에서 한결같이 죄인인 우리들 모두에게 필요한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공평함"을 넘어서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은혜. 모든 인간에게 자기중심성이란 죄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아올 수 있도록, 구원의 초대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원으로의 초대는 도덕적으로 바르게 산 소위 착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눈총받고 멸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집니다. 인간이 규정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태복듬 5장 44, 45절]
인간적인 "공평함"의 우상을 무너뜨린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공평함"의 상자 속에 갇혀 계시기를 거부하는 영원히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만추(晩秋). 가을이 깊어갑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백한 시인처럼, 저와 여러분의 감사도 고난 중에서 더욱 깊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사진: 뉴질랜드 밀포드 사운드 (Milford Sound)에서 2006년 12월 촬영
'새벽에 쓰는 편지 >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0) | 2010.02.11 |
---|---|
고통 당하는 자 앞에 겸손하라 (0) | 2009.10.11 |
욥과 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0) | 2009.09.27 |
고통의 대서사시: 욥기 (0) | 2009.09.23 |
삶의 영원한 물음표? 고통과 용서 (0) | 2008.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