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당하는 자 앞에 겸손하라
"우리는 고통당하는 자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고통은 거룩하고 신비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자에게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울어주면서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통을 통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옥한음 - 욥 6장 14절]
"고통당하는 자 앞에서 겸손하라."
옥한음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심오한 러시아의 소설만큼 "고통"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도 없을 것입니다. 소설 초반에서 카라마조프가의 사람들은 당대에 위대한 수도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조시마 장로를 방문합니다. 깊은 영성의 소유자 조시마 장로는, 수도원을 방문한 카라마조프 일가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돌연 맏아들 드미트리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러져 절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예기치 못했던 돌발사건 앞에서 당황하며 어찌할 줄 몰라 합니다.
나중에 조시마 장로 밑에서 견습수도생으로 일하고 있던 알료샤 카라마조프가, 왜 형 드미트리에게 절했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때 조시마 장로는 말합니다. "내가 절한 상대는 드미트리가 아니라, 그가 앞으로 당할 참담한 고통 앞에 절한 것"이라고...
조시마 장로의 예견대로, 이 격정의 주인공 드미트리는 아버지 표돌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시베리아로 유형 당합니다. 그는 인정합니다. 그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마음속에도 살의(殺意)가 있었었기에 형벌을 달게 받겠다고... 고통이 그를 정화시켜주리라는 믿음이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저항감 없이 유형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고통은 무겁습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고통 앞에서 어느 누가 함부로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조시마 장로 마냥 그저 엎드러져 절할 수 있는 겸손함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더 테레사같이 고통 당하는 사람 속에서, 그 사람과 함께 고통 당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생존이 문제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 불의의 사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 가정이 깨어져 마음이 상처난 사람들....
욥의 친구들처럼 지레 짐작하여,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은근히 정죄(定罪)하고, 비판하고, 설교하고,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논리로 일반화시키고,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나의 어줍잖은 신학을 늘어놓는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들을 당연한 것처럼 잘도 해오지 않았었던가? 말로는 아니더라도 마음속으로... 욥의 친구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통은 비참하지만 거룩하고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알 수 없는 뜻이 그 안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고통 앞에서, 또 고통을 당하는 자 앞에서 겸손, 또 겸손해지는 일 뿐입니다.
글, 사진: 이영순 (지혜의 샘 블로그) 2009년 봄 집 근처(남가주)에서 찍은 루핀과 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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