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기 23장 10절]
도도한 강물처럼
-고통의 대서사시: 욥기-
여름철 한창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강원도 산간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냇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평소엔 그저 깊은 곳이래야 무릎정도밖에 되지 않던 시내가 갑자기 물이 불어나며 모든 것을 삼킬 듯, 강물이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대학시절, 강원도 춘천에서 약 30분 버스를 타고 들어간 곳에 구암(비둘기 바위)이라는 산골마을이 있었는데 이 곳에 사회봉사차 방문하여 20일간 생활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을 중앙에 제법 폭이 넓은 개울물이 구암과 이웃마을을 갈라놓고 있어, 신발을 벗어들고 이 시내를 건너다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평소엔 아이들이 빨가벗고 뛰어들어 물장구도 치고 미역도 감곤 하는 친근한 시내이지만, 일단 비가 내리면,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 진흙탕물이 되어 숨가쁘게 무서운 기세로 흘러내리는 것이어서 어른들도 감히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파른 물살은, 모든 것들을 떠내려보낼 수 있는 미친 듯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구약 욥기를 묵상하며, 폭우 속에 급류(急流)를 떠올립니다. 욥기는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홍수 때의 붉은 강물입니다. 나뭇가지도 가재도구도, 집짐승과 사람까지도 떠내려보내는 강력한 기세를 과시하는 거센 물살처럼, 욥기도 인생의 숱한 문제와 의혹들을 품에 안은 채 거침없이 흘러가는 악과 고통과 인간의 비참이 엉클어지는 거대한 서사시입니다.
욥은 한꺼번에 집과 가축 등 전 재산을 잃고, 10명의 자녀가 같은 날 천재지변을 당해 목숨을 잃는 상실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그를 저주하며 떠나갑니다. 알 수 없는 피부병까지 침범하여, 재 위에 앉아 기왓장으로 가려운 상처를 긁어대는 참담함 속에 남겨진 욥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욥기의 대 장정(長程)은 시작됩니다. 그래도 의롭게 살아오고 있다고 자타(自他)가 공인하던 욥이었는데, 그 자신에게 이런 극심한 고통이 주어지다니...
의인을 참담한 고통의 자리로 몰아넣는 신(神). 욥의 고통을 더욱 더 가중시켰던 것은 바로 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이었습니다. 그의 기존의 신(神) 관념을 뒤엎을 수밖에 없는 혼동스런 사건 속에서 욥은 속시원하게 자신의 의로움을 대변해 줄 분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고대합니다.
욥기는 자신의 태어난 날을 탓하며 죽기를 소망할 정도로, 인생의 가장 깊은 심연속에 빠진 주인공이 활화산처럼 토해내는 뼈아픈 부르짖음의 책입니다. 뭉크(E. Munch)의 그림 "절규"에서처럼, 핏빛 불안과 함께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책, 그 흑암의 터널이 하도 길어 결코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책. 알 수 없는 하나님께로 향한 불같은 항의가 있는 책. 기존의 인과응보(因果應報)적인 신관이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책. 하나님께로 향한 다듬어지지 않은 불경하면서도 정직한 질문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단계의 신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역설의 책, 그것이 바로 욥기입니다.
참담한 고통 속에서 뿜어 나오는 여과되지 않은 말들, 차라리 죽음을 갈망하는 깊디깊은 침체의 한숨, 하나님께로 향한 서슬 푸른 항변들.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욥의 부르짖음이 있기에 저는 욥기를 좋아합니다. 불경(不敬)의 냄새가 물씬 날 정도로, 하나님께 대들며 따지고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혹을 솔직하게 토로했던 욥을 오히려 품어주신, 영원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또한 사랑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공감을 갖게 하고 오히려 신앙의 도약을 이룰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욥기는 역설입니다. 위대한 역설입니다.
장마철, 모든 것을 떠내려보내며 붉은 진흙탕의 급류가 되어 흐르는 위험한 물살이, 훗날 그 강변에 흘러 쌓인 퇴적물들로 인해 비옥한 농토를 일구어내듯, 이렇게 욥기는 고통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 성큼 다가가게 하는 역설의 대 서사시입니다.
글: 새벽에 쓰는 편지 (제 40신) 2003년 11월
사진: E. Munch의 절규
'새벽에 쓰는 편지 >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통 당하는 자 앞에 겸손하라 (0) | 2009.10.11 |
---|---|
욥과 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0) | 2009.09.27 |
삶의 영원한 물음표? 고통과 용서 (0) | 2008.01.30 |
물위를 걷는 것은 쉽습니다 (0) | 2007.10.17 |
아프칸 피랍: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물 같이 돌리소서 (0) | 2007.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