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도(Toledo).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 남짓 남쪽으로 달리면,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그래서 과거로 회귀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도시가 있다.
옛 도시의 성당과 요새가 세르반테스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고, 그 언덕을 감싸듯 휘감고 흐르는 타호강이 있어 더 운치가 있는 역사속의 도시다.
언덕과 강과 중세의 건축물들이 어울어진 똘레도의 그림 같은 아름다움이 눈에 어른거린다.
엘 그레꼬의 작품: 똘레도 전경
똘레도라는 이 중세의 도시가 더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엘 그레꼬(1541-1614)가 이곳을 사랑하여 여기에서 활동했고, 또 그의 영혼이 담긴 많은 작품들을 이 도시 곳곳에 남겨두고 갔기 때문이다.
똘레도, 몇 백 년 전 그대로인 구시가의 좁은 골목들과 집들 위로 위용을 자랑하며 높이 솟아있는 성당과 그 종탑.
스페인의 수석 성당인 똘레도 대성당(Cathedral) 내부에는 그의 기다란 이름(Domenikos Theotokopoulos) 대신 그냥 "그리스 사람"이라고만 알려져 있는 엘 그레꼬의 보석 같은 그림들이 간직되어 있다.
엘 그레꼬(El Greco)의 El Expolio (The Disrobing of Christ)
성당 성물실 안에서 엘 그레꼬가 그린 사도들의 초상화들과 함께 "엘 엑스폴리오 (El Expolio)"를 처음으로 만난다. 1577년에 시작하여 1579년 완성된 유화다 (285 cm x 173 cm).
"희롱을 다한 후, 자색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가복음 15장 20절]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쌔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마가복음 15장 24절]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 그리스도의 옷을 막 벗기려는 순간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캔버스는 중앙에 예수를 중심으로 온통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뒤에서 예수를 고소하듯 경직된 얼굴로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검은 옷의 사람.
예수의 얼굴 바로 뒤쪽 좌 우편에 서서 그의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 때문에 서로 다투는 천박해 보이는 두 사람.
오른편 중앙에 녹색 옷을 입은 채, 한 손은 예수를 묶은 밧줄을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예수의 붉은 겉옷을 벗기려고 하는 험악한 얼굴을 한 사람.
왼편 중앙엔 십자가 처형을 집행할 갑옷을 입은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로마군인. 그런가 하면, 뒤편에는 수많은 폭도들이 예수의 십자가처형을 보기 위해 서로 밀쳐대며 아우성이다.
앞쪽 우편엔 노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엎드린 자세로, 예수가 달릴 십자가의 발판에 못박기가 수월하도록 송곳으로 구멍을 미리 뚫고 있다. 그의 모습을 세 명의 마리아(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Mary Cleophas)가 고통스럽게 바라본다.
증오와 폭력, 살기가 등등해 있는 골고다의 현장이다. 정의가 무참히 짓밟히고, 악이 선을 삼키려고 하는 참혹한 순간이다. 무자비한 자들의 주장이 하늘을 찌르고, 피에 굶주린 무뢰한들의 아우성소리만이 가득한 십자가의 언덕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단 말인가?" 여인들의 탄식과 비탄의 한숨은 폭도들의 아우성 속에 힘없이 묻혀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 참담한 순간에, 그 어느 때보다 깊은 평강을 누리는 예수의 평온한 얼굴과 만난다. 그의 얼굴은 그가 간직한 놀라운 평화로 인해 환하게 빛난다. 엘 그레꼬는 예수 주위의 사람들을 어두움으로 묘사한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어둠의 사람들을 배경으로 선 예수의 얼굴은 하늘의 빛을 받아 환하고 아름답다. 왕을 상징하기 위해 입혀졌던 예수의 붉은 성의는 어둠에 잠긴 주위사람들의 칙칙한 회색 톤의 옷 색깔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보는 사람들의 모든 관심을 예수에게로 모아버린다.
예수의 얼굴에 떨어져 내리는 빛과 선명하게 빛나는 그의 붉은 옷 색깔이, 마치 이 그림 속에는 그만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그림 뒷 배경의 사악하고 천박한 무리들의 표정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예수의 모든 것을 뛰어넘은 듯한 하늘의 평온함을 간직한 얼굴이 그를 향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엘 그레꼬는 명암과 색조를 배합하여, 예수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킴으로 이 극악한 상황 속에서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왕 중의 왕으로서의 존엄함을 보여주신 이심을 부인할 수 없도록 한다.
아, 어떻게 예수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그토록 놀라운 평화를 소유할 수 있었을까?
증오와 살기가 난무하고, 그를 향한 저주들이 무자비하게 퍼부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의 하얗게 드러난 맨 발등에 굵은 못을 박기 위해, 송곳으로 발판을 뚫고 있는 순간이 아닌가?
투박한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얹혀지고 막 그의 옷을 벗기려고 하지 않는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예수의 얼굴에서 평화를 빼앗아 가지 못한다.
왜일까? 그렇다, 예수는 그 순간, 전심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개의치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한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늘 아버지께만 집중된다.
그는 그 순간, 오직 하늘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그와만 대화하고 있었다.
사람의 조롱과 저주는 문제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그의 관심을 끌고 있을 따름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의 가슴 위에 얹혀진 그의 섬세하고 빛으로 인해 빛나는 하얀 손등과 손가락들은 그의 심정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8절]
하나님의 뜻을 묻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피와 땀이 섞인 고뇌는 이미 끝났다. 상황을 초월한 경이로운 평화는 하나님의 뜻에 전심으로 순종하기로 이미 결단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연스런 귀결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엘 그레꼬의 "El Expolio" (성의가 벗겨지는 그리스도)는 수난 당하는 주님의 얼굴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전적인 평온으로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똘레도의 대성당 성물실에서, 엘 그레꼬가 그의 깊은 신심으로 그려낸 "엘 엑스폴리오"의 원화 속에서 만난 예수의 평온이 깃든 순결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상황으로 인해 마음이 분산되지 않는 자,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따르려는 자,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집중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 아닐까? 하늘로부터 오는 내면의 평화가 저도 모르게 스며 나온 성스러운 아름다움....
"엘 그레꼬! 이런 아름다움을 당신께 알게 한 이는 혈육이나 당신의 경험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믿습니다."
글: 이 영순 (2009년 5월 스페인 Toledo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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