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쓰는 편지/영화 묵상

캐스트 어웨이

wisdomwell 2007. 11. 18. 12:26

                                                                   Cast Away:  표류(漂流)
 

 

            
 톰 행크스가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지난 해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명예상을 받은 폴란드의 감독Andrey Wajar는 그의 수상 소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저녁 한때의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데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지만, 그가 만든 영화의 제목("당통", "코르작크와 그의 고아들")을 보면 그가 과연 생각케 하는 작품을 만들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캐스트 어웨이"는 이야기 구성에 작위적인 요소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관객들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영화 속의 톰 행크스 처럼 무인도에 표류한다면, 과연 나는 며칠이나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아주 기본적인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고마움, 실존적인 고독,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애도,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등등... 보는 이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잠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메시지가 담긴 영화입니다.

 

 

영화는 대충 3부로 나뉩니다.  1) 표류 전의 일상생활, 2) 무인도에서의 표류자로서의 삶, 3) 바다에서 구출된 이후의 삶.  그러나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표류 전이나 표류시나, 표류 후나 똑같이 인생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언가 구원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가라앉은 무거운 선율과, 그 선율이 멈출 때마다 한숨쉬듯 간간이 들려오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의 파돗소리를 배경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표류 전: 촉각을 다투는 일, 일의 파도 속에서]  

 FedEx 시스템의 엔지니어로 일하는 척 놀란드(톰 행크스 扮)는 전형적인 타입 A 성격(Type A Personality)의 사람입니다.  우편물을 속달로 배달하는 직업 탓도 있겠지만, 그는 항상 분 초에 쫓기며 사는 바쁘고 급한 현대인입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다정한 시간들보다는 늘 일이 우선되는 삶을 사는 일 중독증 환자입니다.  사람을 위해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일 속에 빠져 삽니다.  그는 "일이란 이름의 바다"에 빠진 표류자였습니다. 

 

 

 

  늘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것은 일로 얽혀진 관계일 뿐, 진정한 인간과 인간의 교류는 없었습니다.  경쟁의식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채, 세속적인 성공과 성취로 자신을 사정없이 내몰고 있었습니다.  악령이 들어간 돼지 떼들이 사력(死力)을 다해 달려가지만, 결국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절벽이었습니다.  복음서의 귀신들린 돼지 떼처럼, 척 놀란드도 공격적이고 저돌적으로 촌각을 다투며 달려가지만 바로 몇 분 후에 다가올 깊은 바다 속으로의 추락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표류:  무인도에서] 

망망대해.  아무도 살지 않는 외로운 섬에 내던져진 척 놀란드.  추위, 굶주림, 외로움, 두려움, 초조함, 불안, 분노, 기대감, 절망, 후회...  이 곳이 모든 것과 단절된 고도(孤島)임을 깨우쳐주듯 간격을 두고 귓전을 때리는 한결같은 파돗소리... 처절한 고독.  인간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  
 

 

 

 무인도에서의 4년간의 삶 가운데, 사랑하는 여인의 작은 사진은, 그에게 반드시 생존해야겠다는 삶의 의지를 북돋워준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묻은 손으로 만진 배구공에 사람의 얼굴과 엇비슷한 자국이 생기자, 그 배구공은 그때부터 그의 사정을 들어주는 친구이자 카운슬러로 변모합니다.  배구공에 그려진 얼굴을 보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끈한 연결들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귀한 일인가?  애인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그동안 일에 미쳐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잠깁니다.  내가 앞으로 구조된다면, 그 동안 미처 못했던 사랑을 그녀에게 퍼부어 주리라.  다짐합니다. 

 

 

 

 [구조후: 대륙 한가운데서의 표류] 
 생존에의 강한 집념과 목숨을 건 모험으로, 척은 드디어 극적으로 구조되는 기쁨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아기 엄마가 되어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의 죽음이 기정사실화 되어 벌써 오래 전에 장례식까지 치러졌었으니 그럴 법도 한 일이지만, 지난 4년간 무인도에서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그리워했던 것이 그녀가 아니었던가?  또 그로 하여금 생존에의 의지를 불태우게 한 원동력을 준 것도 그녀의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제일 먼저 그의 생환의 기쁨을 나누리라 기대했었던 그녀는 환영 나온 수많은 사람들 속에 끼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못해준 사랑을 해주리라 소원했는데, 이제 그녀는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의 사랑은 저만치 가버리고 만 것이지요.

 

 

 

 영화의 라스트 씬은 두 개의 곧은 길이 십자로(十字路)를 이루는 미 중서부의 대 평원을 배경으로 다시 옛 직업에 복귀한 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옛날의 민첩하고 신속했던 그와는 대조적으로, 어릿더릿해 보이는 척이 FedEx 차에서 내려, 서성입니다.  십자로를 앞에 두고 그만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제 표류가 끝난 줄 알았는데, 대륙의 한가운데서 다시 그는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운전자가 방향을 이야기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십자로를 배경으로 서 있는 주인공의 얼굴에서 카메라가 점점 멀어지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주인공.  인생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척 놀란드.  "인생에서 추구할 목적이 일을 통한 성취인줄 알았었다. 그러나 무인도에서의 삶을 통해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음을 절감하지 않았던가.  여인에 대한 사랑이 앞으로의 삶에 목표가 되리라 생각하며 구조를 기다렸는데, 그녀는 이미 내 곁을 떠난 지 오래 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일도, 어떤 인간에 대한 사랑도 그 자체가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다면, 과연 무엇이 내 인생에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허전함, 공허감.  대평원 위에서,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의 앞에 펼쳐진 인생을 살아야 할는지 방향을 잃고 만 것입니다.
 

 

[십자로(十字路)에서] 
 십자로.  톰 행크스의 망연자실한 얼굴 뒤에는 푸른 평원을 종횡으로 가르는 십자로가 너무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십자로는 주인공의 방향감각의 상실을 뜻하지만, 동시에 오직 십자가만이 그에게 길이 될 수 있음을 무언으로 상징해 줍니다.  십자가만이 그의 현재의 상실감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음을... 
 

상실(Loss)을 경험한 자에게 은혜는 다가옵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일을 통한 세속적인 성공, 인간을 향한 애착이, 더 이상 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그의 공허하고 가난해진 마음에 조용히 은혜의 빛이 비추입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강제로 떠밀림 당하고 밖으로 내던져 진(Cast away) 그에게 십자가는 더욱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세상적으로 그가 추구해 오던 가치들을 잃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향해서, 절대자를 향해서 마음을 열 수 있는 필요조건을 갖춘 셈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것에 눈을 뜰 수 있는 여건이 비로소 마련된 것입니다.  톰 행크스를 가운데 두고 펼쳐진 십자로는 십자가로의 부르심이며, 은혜로의 초대입니다. 

  Cast away.  표류하는 자, 내던져 버려진 자, 팽개쳐진 자가, 이제 그 거대한 팔을 벌리고 서 계신 신(神)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인공의 모습은 곧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속적인 것의 상실에 계속 연연해하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릴지, 아니면, 허무한 것의 잃어버림을 통해 영원한 분에게 사랑의 붙잡힘을 당할지, 그 기로(岐路)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바로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14신 (2001년 9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