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더라." [누가복음 2: 7}
성탄절이 오면 으레 읽혀지는 귀에 익은 성경귀절 입니다.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소, 말의 여물통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 짐승들의 밥통 속에 놓인 메시아는, 밥으로 오신 구세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먹히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 생명의 떡, 생명의 밥이 되기 위해 오신 분, 모두를 위한 양식이 되기 위해 오신 분. 죽기 위해 오신 분,
그리고 죽음을 통해 생명을 선사하기 위해 오신 분,
밥과 하늘을 동일시한 김지하 시인의 "밥이 하늘"이라는 시를 읽으면 '밥으로 오신 예수'를 연상하게 됩니다.
밥이 하늘
-김 지 하-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안드레아 보첼리가 프랑크의 "생명의 양식"을 부릅니다.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듯, 청명한 가을 하늘 같이 맑은 보첼리의 음성이 생명의 양식되신 예수를 노래합니다. 아름다운 슬픔이 잔잔하게 파도쳐오는 듯한 우수가 깃든 성가(聖歌)입니다. 내 영혼의 현(絃)이 퉁겨진 듯, 가슴 깊숙이 울려오는 선율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요한복음 6장 48, 50절]
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양식, 밥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먹으라"고.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생명이시고, "육신이 되어 오신 말씀"이십니다. 밥은 그저 그릇에 담겨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씹히고 또 씹혀져 내 몸 안에서 살이 되고 피가 되기 위해 존재합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나의 육체를 성장하고 생존케 합니다.
예수는 곧 말씀입니다. 말씀이 말씀으로만 생경하게 남아 있어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도 밥처럼 먹혀져야만 합니다. 말씀이 먹혀지고 되새겨지고, 그 형체가 없어질 정도로 소화되었을 때만, 그 말씀(예수)은 내 안에서 비로소 육신이 됩니다. 예수가 내 안에 거하여 나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한복음 6장 56-57]
밥이 소화되어 나의 몸의 일부가 되듯, 말씀이신 예수가 내게 먹혀져 나의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말씀을 자꾸 먹다 보면, 무엇이 예수이고 무엇이 나인지 가릴 수 없는 즐거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 14장 1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4장 20]
이 아름다운 성탄의 계절에 주(主)여, 어서 내 마음에 오시옵소서.
오셔서 내 생명의 양식이 되시옵소서.
임마누엘 (God with us), 나의 주님.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17신 (2001년 12월)에서.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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