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쓰는 편지/상담수첩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Father' God Language

wisdomwell 2007. 11. 17. 12:52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라는 가장 친숙하고 알기 쉬운 이미지를 통해서 인격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의 아버지라는 필터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아마도 어린이들은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 거의 하나님과 육신의 아버지를 동일시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참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영상이 성서의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왜곡된 하나님의 영상일 수 있으며 그러한 잘못된 영상이 참 하나님과의 만남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무 엄하기 때문에, 그 앞에 늘 기가 죽어 있는 아이는, 심판의 하나님을 알 수 있어도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을 만나는데 무척이나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아이와 약속을 했다가도 언제 했느냐는 듯 잊어버리는 아버지 밑에 자란 아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변함없으심을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항상 사업 때문에 바빠 아이와 거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아빠 밑에서 자란 아이는, 저 멀고 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알 수 있어도, 바로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내 옆에서 함께 괴로워 해주시는 친근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칭찬에 인색하고 항상 완벽하게 일해 낼 것을 주장하는 아버지 아래 자란 아이들은, 완전하지 못한 그대로를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체험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야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님들, 특히 아버지들은 아이들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서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 상담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내담자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신의 개념과, 육신의 아버지의 특질을 말해 보라고 하면, 그 두 가지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상담을 하면서 같은 경험을 하곤 합니다.

 

몇 년 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Johnny(가명)를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우울증이 심해 자살기도를 하곤 했던 학생입니다.  어느 날 상담 도중 그는 돌연 제게 "크리스천이세요?"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악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시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고 있어요.  무관심하게 그냥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단호한 그의 어조 속에서 분노와 외로움이 진하게 묻어났습니다.

 

하나님을 "무관심한 분"으로 그 자신의 틀 속에 묶고 있는 Johnny를 보면서 나는 그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방치해둔 채 무책임하게 돌아다닌 아버지.  그러다가는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아들을 한 번도 이해해 보려고 하지 않은 아버지.  "무관심한 아버지".  Johnny의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처럼 그에겐 무관심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돌연스런 Johnny의 질문, 그러나 너무 익숙한 질문.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수천 수만 번 되풀이되어 왔던 질문.  그러나 매번 물어질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질문 앞에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Johnny, 참 좋은 질문이다.  나도 바로 그 질문 때문에 한동안 고민했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방치해두는 무관심한 분이라면 나도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  한 번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너는 어떤 답을 줄 수 있겠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렴"

 

 Johnny와의 이런 대화가 오고간 다음 날 우연히 이사야서 49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느니라."  [이사야 49: 1-5, 14-17]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자녀들을 무관심하게 방치해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간곡하게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느니라." 

 

 

그 후 다시 Johnny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Johnny에게 그의 우상(왜곡된 하나님의 영상)을 타파할 수 있도록, 이 이사야서의 하나님을 소개할 수 없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느니라."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4신 (2000년 11월)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