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는 시간. 건성으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함께 있는 시간들. 내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들을 나의 에너지를 투자하여 집중하여 들어주는 일.... 말의 내용뿐 아니라, 그 뒤에 감추인 마음까지 능동적으로 들어주며, 상대방의 감정에 함께 공감해주고 배려해 주는 것, 그것이 진정 질적으로 함께 하는 시간일 텐데 정작 나는 이렇듯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한 시간을 내가 사랑한다는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조차 갖지 못하며 일에 쫓겨 허둥지둥 살고 있습니다.
장영희 교수가 쓴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손톤 와일더(Thornton Wilder)의 "우리 마을(Our Town, 1938)"을 소개한 부분을 읽으며 새삼, 1970년대 후반 무대에 올려졌던 "우리 읍내"를 보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여주인공 에밀리가 젊은 나이로 죽은 후, 꼭 하루만이라도 다시 이승의 세계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그녀의 열두 번째 생일로 다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혼령이 된 에밀리는 자신의 어머니와 12살 난 자기 자신이 대화하는 장면을 지켜봅니다. 무언가 집안일에 분주해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살고 있는 에밀리를 보지 않고 일에만 열중하며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는 어머니를....
"엄마, 절 그냥 건성으로 보시지 말고 진정으로 봐 주세요. 지금으로부터 14년이 흘렀고, 전 조지와 결혼했고, 그리고 이제 죽었어요.... 하지만 지금, 바로 지금은 우리 모두 함께이고 행복해요. 우리 한 번 서로를 눈여겨보기로 해요." 안타깝게 간구합니다. 그러나 저승의 사람이 된 에밀리의 말을 엄마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냥 돌아가겠어요.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고,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쳐다볼 틈도 없어요. 안녕, 세상이여. 안녕.." 결국 더 이상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에밀리는 아픈 마음을 끌고 무덤으로 되돌아갑니다.
연극중 이 장면을 보며 가슴이 저려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그리고 문득,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머니와 진심어린 대화들을 나누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노모와 함께 있기보다는 나는 이렇게 어머니를 저 쪽 방에 내버려 둔 채, 에밀리 엄마가 설겆이와 집안일 돌보느라 열중해 있었던 것처럼, 저녁 준비하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느라 바쁜 시간을 보냅니다. 눈을 마주친 다정한 대화는? 나는 에밀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설혹 노모와 같이 있어도 신문이나 TV에 눈을 고정한 채 그렇게 건성으로 어머니를 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에밀리가 무덤에서 하루를 얻어 다시 돌아와 어머니의 눈길을 그렇게 애원했는데.... 함께 충분히 있어주기를.... 몸과 마음이 같이 있어주기를.... 결국 인생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 빼면은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지 않은가?
어머님 91회 생신날 (2006년 10월)
오늘 상담소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에 관한 세미나 중에 들었던 이야기가 뇌리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음식이 아시안 가정엔 참 중요한 것이긴 해도, 노인들이 음식보다 더 필요로 하는 것은 함께 있어줌이다. 함께 이야기를 하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어머니도 그렇지 않은가? 언니들이 오면, 무언가 저녁 준비해주느라 바쁜 것보다, 당신과 눈 마주쳐 함께 이야기해주는 것을 더 원하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제가 저녁 늦도록, 설거지하고 그 다음날 먹을 것 대충 준비하고 부엌 바닥 닦고 늦게 까지 어머니 방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느 순간 아래층에 내려와 불쑥 이런 말을 하시곤 합니다. "너 나랑 있기 싫어서 일부러 이렇게 늑장부리며 일하는 거지?" 나는 혼자서 힘에 겨워 집안일 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불쑥 역정을 내시는 어머니의 말이 저를 괴롭히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엉뚱함이 야속하고, 그러치 않아도 지쳐 있는데 이런 비난의 말을 들으면 맥이 풀리며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곤 했습니다.
오늘 강의를 들으며, 어린아이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비싼 집이나 가구가 아니라 부모가 함께 해주는 시간들인 것처럼, 이제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신 노모가 원하시는 것도 집안이 정돈된다거나, 음식이 준비되는 것보다, 당신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었구나... 새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늘 이곳저곳 아프다는 말들이 주제가가 되어 있는 노모를 돌보는 것이 버거워질 때마다, "우리 읍내"의 주인공 에밀리의 "이제 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나를 쳐다보고 나와 함께 해달라"는 안타까운 하소연 장면을 기억속에 되살리리라.. 다짐해 봅니다. 어머니 가시기 전 이 시간들이 얼마나 귀한가? 어머님 벌써 90을 넘기셨으니 대화할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았겠는가? 노모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이 땅에서의 남은 시간들이 너무도 촉박하다는 생각이 나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리고 늘 함께 하기를 원한다 해도 그럴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이제 왜 예수의 이름이 임마누엘("God with us.")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혼자 당하는 고통과 함께 당하는 고통은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군가 가까이 와서 나와 함께 고통을 나눌 때와 홀로 고통을 겪을 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잘 안다. 이런 위로가 가장 온전하고 위력 있고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성육신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우리 삶에 친히 오셔서 '내가 언제 어디서나 너와 함께 있다'고 일깨워 주신 것이다." -헨리 나우웬/춤추시는 하나님-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장 20절]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71신 (2006년 6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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