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쓰는 편지/계절의 향기

겨울나무

wisdomwell 2008. 1. 13. 10:00

겨울나무

 

 아침 커튼을 여니, 밤새 분 바람에 남아있던 마지막 잎새들을 벗어버린 겨울나무들이 앙상하게 그 몸을 드러내고 서 있었습니다.  하루 사이에 거의 모든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렇게도 풍성해 보이던 나무가 아주 빈약한 몸을 드러내고 부끄러운 듯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본체였어요.  이것이 나의 진면목이었습니다."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사실 별 볼일 없는 존재였습니다.  무성한 잎으로 나를 가리고 있었던 것 뿐이죠.  그 잎들을 벗어버린 지금, 사실 나는 별로 볼 것이 없는 그런 존재랍니다."  겨울 나무들의 고백이 나는 좋습니다.

 

 

 

 

 과감하게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옷들을 벗어버리고, 자랑스런 것들을 던져 버리고, 발가벗은 채 설 수 있는 나목들의 용기가 가상합니다.  새 봄을 위하여,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고 서 있는 겨울나무들.  추운 바람 속에 옷도 없이 용감하게 서 있는 나무들.  새로움을 위해 낡은 것들을 과감히 떨쳐 버릴 수 있는 나목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낳기까지 벌거벗은 수치를 감당하는 겨울나무들의 그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가끔 꿈 속에서 공중 앞에서 벌거벗고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당혹해 하는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 나를 싸고 있는 위선적인 요소들이 그런 꿈으로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지금 나를 그럴 듯하게 치장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내가 쓰고 있는 가면들은 어떤 것일까?  이것들을 벗어버리고 선 나의 적나라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타락 전,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처럼, 나신으로 서 있어도 당황하지 않는 꿈을 꾸게 되기를 원합니다.  창밖에 겨울나무들처럼, 그렇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영원히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여기면서 내가 움켜잡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쉽지만 그 동안 함께 했던 나뭇잎새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는 단풍나무처럼, 이 겨울의 문턱에서, 이 마지막 달 12월에 내가 떠나 보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립보서 3장 7,8절]


 지난 가을 내내 단풍잎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겨울나무의 겸허함 속에서 내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는 세모입니다.  단지 신록의 약속만을 믿고,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감행하는 나무들.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용감한 나목들.  조용히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겨울나무들.  그들의 다소곳한 순종을 배우고 싶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5신 (2000년 12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