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선교여행] 나록(Narok) 김순태/권오애선교사의 비전
나록(Narok) 김순태/권오애선교사의 비전
나록에 도착하니 차량도 많아지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건물들도 많아, 이곳이 케냐에서는 꽤 큰 도시임을 알 수 있다. 한국으로 말하면, 춘천 정도의 도시일까? 계속 인구가 증가해가는(현재 인구 5만 명) 발전 도상의 도시라고 한다.
김순태 선교사는 지난 1985년부터 케냐에서 사역해 왔고, 현재는 마사이 부족의 복음화를 위해 나록 바이블 칼리지에서 마사이 교회 목회자를 양성하고 나록 기술학교에서는 청소년들에게 기술교육을 통하여 사회활동을 하도록 돕고 있다. 김 선교사의 사역지인 바이블 칼리지가 있는 교회로 들어간다. 벽돌로 잘 지어진 본 교회당 외에도 식당 부엌 등이 있는 건물, 또 다른 부속 건물들이 있다. 본래 서구인들의 것이었는데 손익이 맞지 않아 그들도 포기하고 간 건물을 인수하여 이젠 웬만큼 궤도에 올려놓았다.
마침, 김선교사님은 나이로비에서 목회자를 위한 수련회가 있어 출타한 까닭에, 대신 김선교사의 부인인 권오애 선교사가 우리 일행에게 나록에서의 두 분의 선교상황을 소개한다. 권선교사는 특별히 마사이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해왔고, 우리들에게 이곳 여성들의 어려운 삶의 정황을 알려준다.
마사이 부족들은 딸을 결혼시키면, 지참금조로 소들을 받기에, 딸이 12세만 되어도 일찌감치 혼인을 시킨다. 때로는 더 많은 소들을 받기 위해 60세가 넘은 부자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보낸다. 시집가기가 두려운 소녀들이 무작정 집을 도망 나와, 선교사님께로 와서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해도 좋으니 살게 해달라고 딱한 사정을 말하므로 그 소녀들을 데리고 있게 된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경제적인 여건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또한 신학을 공부하려는 마사이의 젊은이들을 위해서도, 통학이 불가능한 관계로 기숙학교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어려움이기도 하다. 등록금과 함께 숙식을 보장해주어야만, 마사이의 신학생들을 길러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56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학생 기숙사 건물이 완성되었는데, 그 안에 전기공사, 페인트, 가구 등을 완비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활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다. 살기 위해선 식수가 있어야 하므로 우물을 파는 작업을 했는데, 150m까지 파 들어가도 물이 나오지 않아 포기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지막 시도로 다시 파 들어갔는데, 180m에서 고대하던 물이 기적처럼 터져, 식수난을 우선 해결하게 되었다. 다음 과제는 이 물을 캠퍼스 여러 지역으로 공급하기 위해 물 저장 탱크 3개를 건축하는 일이 남아있다.
마사이 사람들에게 우유는 필수 음식이다. 케냐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커피나 홍차에, 뜨겁게 끓인 우유를 듬뿍 부어 마신다. (나도 케냐 호텔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아침식사시 커피에 뜨거운 우유를 반반씩 섞어 즐겨 마시곤 했다.) 권선교사는 우유를 이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는 젖소가 여러모로 일반 소보다는 유리하므로 지금 가지고 있는 20 마리의 소를 2마리의 젖소와 바꿀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40에이커 학교 부지 중 일부를 목장으로 개발하여 젖소 20 마리를 키우면서 여기서 나오는 수입원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사진: 권오애 선교사님 (케냐 나록)
바이블 칼리지의 텃밭엔 콩이 자라고 있다. 이 밭의 산물들이 또한 이곳에서 기숙하는 학생들을 위한 식량을 제공한다. 이 바이블 칼리지를 통해 양육된 마사이족 신학생들이 목회자로 다시 태어나, 각각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그 마을에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뜻을 펼치도록 돕는 것이 이 학교의 목표다. 인간의 기본 권리를 무시하는 잘못된 풍습들이 복음이 들어감으로 도전 받고, 개선되는 일들을 기대한다. 20세기 초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시대에 있었던 일들이 케냐 마사이 마을에서는 지금 재현되고 있다.
서양 선교사들이 교육의 중요성을 계몽하며 학교에 보내라고 데리러 와도, 당시의 많은 부모들은 그들의 딸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막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 아닌 우리 어머니도 그 희생양이셨다. 당신의 할머니가 거세게 반대한 까닭에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학교에 갈 수 없었고, 90이 넘으신 지금까지도 그때 일을 한스러워 하신다.
"1907년 한국의 대 부흥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새 진리를 깨달은 교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 규범들'을 만든다. 살인, 강간 등 인류 보편적인 죄도 있었지만,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죄의식 없이 행해지던 행위들도 포함되었다. 예를 들면, 조혼이나 축첩, 노비 제도와 제사 의식, 술과 담배 같은 것들이다. 이런 행위들은 봉건 사회, 특히 양반 사회에서는 당연지사로 여기며 행하던 것들이지만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금기사항'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이덕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사이 사람들의 언어로 이들에게 선포될 때, 아버지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어린 딸의 눈물을 강요했던 풍습들이 사라져가리라 믿는다. 백 년 전 우리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록의 두 분 선교사는 앞으로 학교 대지 40에이커에 유치원, 초 중 고등학교를 개설하고, 나중엔 대학으로까지 발전시키려는 비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 학생을 위해 연간 450 달러 정도의 등록금과 기숙비가 필요한 실정이다. 하나님께서 돕는 손길들을 통해 역사하시리라는 확신을 두 분 선교사님은 갖고 계시다.
(김순태 선교사 Email: Joseph.kim@aimint.net)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87신
사진: 2007년 6월 케냐 나록에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