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20여만 명이라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희생자를 낸 아이티 지진의 참상을 접하며, 자연재해가 불러온 사람들의 고통 앞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집니다.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재앙에 대해 자연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2004년 성탄절 무렵에 남아시아를 강타했던 해일 후 썼던 글을 올립니다.
쓰나미(Tsunami):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지난 연말부터 연초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가슴속에 무겁게 맺혀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쓰나미(海溢)였습니다. 남아시아를 강타하고 순식간에 폐허로 만든 쓰나미. 태국과 스리랑카, 인도네시아의 비치에서 뛰어놀던 순진무구한 바닷가의 아이들을 수만 명이나 휩쓸어 간 파도. 이 상상을 초월하는 해일과 그것이 가져온 참상에 대해 뭔가 쓰고 싶은데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 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왜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신(神)은 왜 이 일을 일어나게 하셨는가? 고. 희생자에 대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어합니다. 재앙과 그 의미를 알고 싶어합니다. 마음속이 여러 가지 존재론적 질문들로 들끓기 때문입니다. 신문지상에 이 재앙에 대한 각 종교의 견해가 나와 관심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차라리 편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선(善)을 증진시키는 사랑의 신(神)을 믿고 있지 않기에, 재앙은 그저 재앙이고 자연재해일 뿐이므로 특별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신(神)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런 가혹한 재앙을 가져온 신(神), 무고한 어린이들의 생명을 대량으로 앗아간 신의 처사가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아 가슴속에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을 품게 됩니다.
불교나 힌두교의 답변은 의외로 쉬었습니다. 모든 것을 업보(業報)로 봄으로... 그들이 당한 재난도 그들의 업보이고, 그들의 업보에 따라 또 다른 사람이나 짐승으로 태어날 것이므로...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귀결짓기에 그 답변은 구차한 설명없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이슬람교의 사람은 그것은 알라의 뜻이고, 우리는 그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내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신 신의 뜻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동의는 하면서도 왠지 존재를 묻는 심각한 질문 앞에서 슬쩍 피해간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경우, 재앙을 두고 예나 지금이나 같은 종교 안에서 위의 모든 답변들을 포함한 다양한 견해들이 펼쳐지는 것을 봅니다.
"자연법칙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이미 돌아가게 하셨으니, 그저 운행되게 할 뿐이다. 두 개의 지각 판(플레이트)이 법칙대로 부딪쳤을 뿐이다." 고로 하나님이 특별히 이 재앙에 관여된 것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태엽을 감아놓은 대로 장난감 차가 움직여간 것이므로 그 장난감 차가 움직여 가다가 유리컵을 깨뜨렸다면, 그것은 장난감이 한 것이지, 태엽을 감아놓은 사람과는 무관하다는 논리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면죄부를 주기 위한 설명일까요? 하나님이 이 재앙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하면, 선하신 하나님 상(像)을 깨지 않아도 됨으로 마음은 어느 정도 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너희 머리칼 하나도 세시는 자상한 하나님"을 평소에 찬양해 왔었는데 그러면, 그러한 찬양은 그저 입으로만 부른 것입니까? 살아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의 삶 속에 계셔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지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남아시아 대양에서 두 개의 거대한 플레이트(판)들이 부딪치는 것을, 원하기만 하신다면 얼마든지 막으실 수 있지 아니 하셨겠는가? 무신론자들처럼, 그러한 창조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몰라도,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는 한, 위의 설명은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데, 수십 만 명의 목숨이 한꺼번에 휩쓸려 가는 일에 하나님이 속수무책으로 당신이 만든 자연법칙에 얽매여, 그대로 방관했다는 말인가? 원하기만 하셨다면 하나님은 이 일을 막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니겠는가? 그런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앙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마음이 꺼림직 하던 안 하던 하나님께서 이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다는 결론에 도달케 합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편 90: 1-7]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러한 악한(?) 일을 허용하셨는가?
불교나 힌두교의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인과응보로, 업보로, 운명으로 간주해버리면 참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기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 역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사람들에게 피해자를 탓(victim blaming)하는 성향이 있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무언가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이 그에게 생긴 것이라고 책임을 물음으로써, 나에게도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잠재우는 성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에, 위의 간편한 답변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켜주곤 합니다.
구약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욥의 참담한 재앙 앞에서, 바로 이 인과응보의 신학을 토대로 욥의 재난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성서의 예가 될 것입니다. 샌 프랜시스코의 지진을 놓고는 그곳에 동성연애자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내린 재앙이었다고, 노스리지 지진에도 그곳에 포르노 산업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그곳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는 견해들이 제법 호응을 얻고 있지 않았었습니까?
그리고 이 논리 속엔 나는 저들보다는 죄가 없기에 이러한 재앙을 당하진 않으리라는 헛된 자위(自慰)와 교만이 숨겨져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과연 여기는 죄악이 없는 곳이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운 곳이라고 당당히 외칠 장소나 사람이 이 세계 가운데 어디 있겠습니까?
구약 잠언서와 동양의 격언들이 주장하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논리는 사실상 어쩌면 우리 삶의 99 %에 해당되는 영역에서 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1 %의 예외를 간과해선 안 됩니다. 욥의 재난과 예수의 십자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당한 고통들은 재난의 원인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간단 논리에 있지 않음을 확실하게 부각시킨 성서 속의 예(例)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왜 무고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악한(?) 일을 허용하셨는가? 하는 인류역사를 두고 계속 물어지던 질문에 다시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 자체에 애초부터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질문 속엔 선과 악을 인간의 머리로 알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음을 봅니다.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풍요, 육체적인 생명과 건강이 유지되면 그것이 선이고, 그것이 허용되지 않으면 악이란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 대부분 우리가 생각하는 선(善)의 내용이 아닙니까? 이런 것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무하셨고 잔인하신 것입니까?
인간의 오류는 나의 머리 속에, 나의 신(神) 관념이란 틀 속에 하나님을 집어넣고, 그것에 어긋나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데 있습니다. 일례로 인간의 정의(正義)는 늘 공평함을 주장합니다. 열심히 오래 일했으면,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조금 일했으면 조금 임금을 받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셨듯이 두 사람에게 똑 같이 풍족한 임금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공평성을 넘어선 은혜의 영역에 계신 분이므로...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의(義)에 걸맞는, 인간이 생각하는 공평한 하나님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포도원주인의 행동이 부당했던 것처럼 따지고 들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장 8, 9절]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은총의 하나님을 우리는 줄곧 나의 의(義)라는 틀 속에 가두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비판하려고 합니다. 하늘과 땅처럼 하나님과 인간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므로, 인간의 준거의 틀을 가지고 우리에게 닥친 사건을 해석하는데는 무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일의 가공(可恐)할 위력을 보며, 이 땅에서의 육체적인 생명이 끊어져가는 데 대해, 그들의 재산이 물 속에 휩쓸려 간데 대해, 가족간의 사별(死別)에 대해 애석해하고 가슴 아프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하루 속에서 천 년의 세월을 보고 계신 분이 아닙니까?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은 분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무신론자들처럼, 이생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왜 어린아이들을 이렇게 빨리 이 땅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데려 가셨냐고 하나님께 따질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영원 속에서 바라볼 때, 내가 육체를 입고 사는 삶의 날들이 해일 희생자들의 그것과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단지 조금 더 연장될 뿐인 것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후서 3장 6-8절]
하나님 심판의 날
이번 쓰나미의 피해지역이 워낙 광범위하고, 희생자도 다양한 인종, 종교, 나이에 걸쳐 생겨났기에 죄의 결과라는, 피해자를 탓하는 논리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누구나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해일에서 일어났듯이 지각 판(플레이트)들이 이 곳 뿐만 아니라, 지구의 서너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부딪친다면, 문자 그대로 지구의 종말이 올 수도 있겠다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장 27절]
성서에서 경고하고 있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 주님 재림의 날이 이러한 형태로 얼마든지 도래할 수 있으리라는 예고편을 보여주신 것은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해일의 희생자들을 통해, 우리 생존자들은 지구의 종말, 하나님 심판의 날이 저만치 나와는 무관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우리에게 가깝게 도래한 것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의 날 보다 더 빨리 (확실히 백 년 이내에) 내게 닥쳐올 나의 죽음의 날을 위해 준비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나의 영혼의 생명, 죽어도 사는 생명을 위해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원한 생명에 관한 소식들을 아직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이생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늘 자각하면서 순간 속에서 영원과 잇대어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 11-12]
"아침에 주의 인자(your unfailing love)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 . .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시편 90: 14,17
]
맹그로브 나무와 산으로 간 코끼리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범죄하면서 일어난 것은 모든 관계들의 파괴였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그의 임재하심 속에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그의 범죄 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순종이란 죄가, 반역의 거센 물결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막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파괴된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서로 돕고 서로의 존재를 기뻐하는 관계가 왜곡되어서 집착하고 지배하는 관계로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상실했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바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범죄의 결과로 세 번째 파괴된 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였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보살피고 다스려 서로 조화를 이루는 관계에서 자연을 착취하는 관계로 변하자 자연도 보란 듯이 인간을 골탕먹이게 된 것입니다.
"맹그로브 나무만 베지 않았더라면..." 지난해 12월 31자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남아시아 지역이 휴양시설 건설과 새우 양식업 등을 위해 맹그로브 나무를 마구 베어 내는 바람에 쓰나미 피해가 더 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맹그로브는 열대, 아열대 지역 해안에 군생하면서 해안과 육지 사이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나무인데 인간의 이기심을 위한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베어짐을 당하고 대신 고급 호텔들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맹그로브와 함께 완충역할을 하는 산호초와 모래 언덕도 불도저에 밀리게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지진이 나자, 바닷물은 아무런 장애 없이 순식간에 밀려들어 인간이 세워놓은 이기심의 바벨탑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휩쓸고 가버렸습니다. 말없이 인간에 의해 당하기만 하던 맹그로브 나무와 산호초가 톡톡히 인간의 착취에 따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가를 무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명하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자연을 다스릴 때, 자연은 더 많은 풍요함으로 인간에게 보답해 올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래,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 세대의 비극임을, 맹그로브 나무는 쓰나미를 통해 뼈아프게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해일이 나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코끼리들이 줄을 끊고 산으로 산으로 내달아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쓰나미가 할퀴고 간 지역엔 야생동물들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의 민감한 본능이 그들로 하여금 위험을 피해 높은 곳으로 달아나게 했던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이들 동물들에 비해 얼마나 둔감하고 뒤떨어진 것인지....
하나님 창조의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동물들. 코끼리의 순한 눈망울 앞에, 하나님 지으신 자연과 다른 피조물들을 멸시하며, 자만에 차 있었던 우리들의 모습이 새삼 왜소하고 부끄럽게 느껴짐을 경험합니다.
재난의 경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해일에 대한 사전 경고가 있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피했을 것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경고가 구체적으로 있었음을 신문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듣는 귀"가 없었습니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에 1월 2일자 신문에 의하면, 인도네시아 지질학을 10년 간 연구해온 저명한 지질학자 케리 시(미국 캘리포니아 공대) 교수가 대형참사를 사전에 예고했지만, 인도네시아 정부 당국자들에 의해 무시되었다는 기사입니다. 케리 시 교수는 지난 해 7월부터 "인도네시아에 대형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고, 지진과 쓰나미의 가능성을 알리며 해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집을 옮길 것을 권장하는 포스터를 5천 장 만들어 섬 지역에 배포했다는 것입니다. 포스터가 배포된 지역은 모두 이번 참사로 집중적인 피해를 본 곳입니다. 시 교수는 인도네시아 정부당국자를 만나 해안지방 주민들에게 대피요령을 알리는 등 예방대책을 교육하는 방법들을 권유했지만, 묵살되었다고 합니다. 시 교수의 권면이 받아들여져 그곳에 대대적인 예방교육이 실시되었더라면,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마태복음 13장 14, 15절]
인도네시아의 관료들은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 교수의 권면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호화롭게 살던 부자는 죽어 음부에 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천국에 갔습니다.
음부에서 갈증을 느끼며 괴로워하던 부자는 이렇게 청합니다. "여기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내 형제가 다섯인데, 부디 나사로를 그들에게 내려 보내사 이런 곳에 오지 않도록 증거하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 성경이 이미 이곳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성경을 보면 된다." "그래도 죽은 나사로가 가서 회개하도록 권면하면 회개할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했다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어 말해도 듣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지금도 복음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성경을 통해, 교회를 통해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진지하게 선포된 말씀을 품는 가슴이 필요합니다. 인도네시아 관리들이 그 말을 진지하게 들었더라면, 그 말을 듣고 실천에 옮긴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이번 해일로 희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귓전에 들려지는 복음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단지 육체의 생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얻는 일 입니다. 영원한 생명과의 연결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도네시아의 관리처럼, 무감각하게 묵살하지 마십시오. 들을 귀를 가지십시오. 잘 기경된 마음밭을 준비하여서 떨어지는 말씀의 씨앗을 믿음으로 품으십시오.
지구촌: 하나의 공동체
해일로 인해 처처에 처참한 장면들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보기 좋은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인과 군장비들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투입된 것입니다. 같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동원되곤 하던 헬리콥터, 항공모함, 기타 군장비들이, 이재민들에게 줄 식량을 나르고, 필요한 물품들을 전하고, 총부리를 겨누던 군인들이 파괴된 현장을 새롭게 복구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병자를 돌보고 있으니 이보다 더 감동적인 장면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쓰나미를 통해 한 인간의 목숨이 얼마나 귀하며,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서 함께 고통을 나눔으로써 지구촌 온 인류가 반목없이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지는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자연의 재앙 앞에서 우리는 새삼스레 서로 증오하고 같은 인간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전쟁터의 장면들이 얼마나 덧없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땅에 사랑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라며, 주 안에서 이 영순 드림
글: 새벽에 쓰는 편지 (제 54신) 2005년 1월
사진: 위에서 부터 1) 포루투칼 리스본, 2) 호주 Sydney Bondi Beach, 3) Rowland Heights 들꽃, 4) 샌 프란시스코, 금문교 5) 호주 시드니 갭팍, 6)리스본 해변, 7) 피지섬 근처 South Island, 마지막 사진) 뉴질랜드 Milfor Sound 에 Stiring Fal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