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순종
마리아의 순종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 1장 30-38]
유명한 미술관들을 방문해보면, 으레 "수태고지 (Annunciation)"라는 제목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메시아를 임신하리라는 놀라운 통보를 받는 동정녀 마리아의 그림입니다. 각 세기에 따라 또 화가들에 따라 변형된 스타일로 그려져있긴 하지만, 소재는 늘 동일합니다. 산촌에서 순박하게 살아온 한 십대 후반의 처녀에게 주어진 이 소식은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내용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수 천년 기다려온 메시아가 오시다니...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감히 그의 어머니가 되다니...
남자가 없이 성령으로 잉태된다니 그것은 또 무슨 알 수 없는 말인가? 지금 정혼하고 결혼을 하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처녀가 임신하면 돌로 쳐죽이는 것이 우리네 관습인데... 그러면 앞으로 나는 어찌 될 것인가? 가브리엘 천사의 빛나는 후광을 훔쳐보던 마리아의 머릿속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만 가지 생각들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결단은 명쾌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엄청난 사명, 놀라운 사건의 예고 앞에서 그녀의 답변은 너무도 간단명료했습니다. 정말 막중한 일인데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의논해 보고 알려드리겠다고도, 정혼한 총각의 의사를 타진해 보겠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나는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다고 손을 내젓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믿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그러기에 나는 못합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말 할 수 없는 것임을...
사양하는 것, 사명을 맡기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양하고 핑계하는 것은 사실 겸손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나 자신을 의지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나는 못한다.."고 손을 내젓게 하는 것입니다. 제 자신을 돌아볼 때, 저는 얼마나 많이 그런 제스츄어를 취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부족을 채워 주시고 온전케 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나 자신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못 하겠다고 손을 내저으며, 일 할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곤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모세처럼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곤 했는데, 그 밑바탕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깊은 불신이 겸손을 가장한 채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나의 부족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빛을 발하며 나타납니다. 그런데 나는 나의 약점을 부끄러워하며 가리려고만 했습니다. 선뜻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흔쾌히 나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재고 또 재고 계산했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믿지 않고, 내가 하려고 했기 때문에 잘 될 수 있겠나 재고 또 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가난한 산골 마을 나사렛, 나다나엘조차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말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던 어리숙한 소녀였습니다. 얼마든지 나는 못해요. 나는 벌써 정혼한 남자가 있어요. 제가 메시아의 모친이 되다니요? 교육 잘 받은 명문가의 아가씨들이 얼마든지 있는데요. 나는 안 돼요. 말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부족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 자신을 비워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절대 주인에게 순종하는 종처럼, 그녀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비웠습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빈 그릇처럼 비워 드렸습니다. 나의 뜻, 나의 원의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깨끗하게 나의 뜻을 제거한 채로 하나님께 자신을 도구로 쓰시도록 내어 드렸습니다. 위대한 신앙, 아름다운 순종을 봅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누가복음 1장 45절]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축복의 말대로, 마리아는 순종으로 말씀을 잉태하고, 말씀을 길러,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도록 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겸손을 가장한 불신이 더 이상 나의 몸짓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의 힘, 나의 재능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만을 신뢰하는 믿은 여자가 되게 하소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고히 간직하고 되새겨, 그 말씀이 생명이 되어 태어나게 하소서.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29신 (2002년 12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