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쓰는 편지/상담수첩

향기를 날리는 천사의 트럼펫

wisdomwell 2008. 5. 18. 15:04

향기를 날리는 천사의 트럼펫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 [민수기 10장 1, 2절]

 

 

 

  햇빛 밝은 지난 5월의 오후, K와 함께 패사디나에 있는 노톤 사이몬 박물관에 갔었다.  연꽃이 소담스레 핀 정원을 거닐다가 박물관 뒤뜰 언덕길 옆, 피크닉 테이블이 있어 그곳에서 한동안 담소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침 그 길엔 천사의 트럼펫(Angel's Trumpet)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나무들이 무리 지어 있었는데 한창 꽃이 만발이었다.  트럼펫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꽃들은 나팔 모양이지만 호박꽃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노란 꽃들이 자신의 무게를 주체할 수 없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피어 있다기보다는 주렁주렁 달려있다고 해야 할까?

 

 

 

 

 

 

"참 겸손한 꽃이에요.  저렇게 머리들을 숙이고 있으니...  차례차례 피어있는 게 아주 질서정연해서 좋네요."  K가 말한다.
 "저 꽃 이름이 무언지 아세요?  에인젤스 트럼펫, 천사의 트럼펫이에요."  이 수 백개의 트럼펫이 일제히 연주를 시작한다면 참 장관일 것이다.  그 음악 소리는 또 어떨 것인가?  K에게 꽃 이름을 가르쳐주며 마치 관악합주단 앞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에 잠긴다.

 

 K도 한껏 기분이 고조되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오늘 아침 한 가족 여섯 명에게 전도했어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백인이든 멕시칸이든 상관치 않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 합하면 지금까지 248명에게 예수를 영접하도록 전도했지요.  그 이름들을 적어 단지 속에 넣고 그 단지를 붙들고 날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길에서, 또는 전철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접근하여, 그들의 장점을 칭찬해주며, 또 어린 아기들이 있으면 귀엽다고 진심어린 찬사를 보낸 후 "Jesus loves you." 하며 전도를 했다고 한다.  남의 눈을 의식한다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은 없다면서.... 
 "아무런 스스럼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어요.  몸이 아프고 정신적으로 병증상이 있어 괴로울 때가 많지만 이때만큼은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모르겠어요.  입을 열어 예수를 모르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강력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으니, 내가 가는 모든 장소가 선교의 장소인 셈이지요.  특별히 교회의 스탭으로 일하지 않아도 이것이 곧 나의 사역지가 아니겠습니까?" 
 

입을 열어라!  트럼펫을 불어라!  천사의 트럼펫 꽃 앞에서 우리는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라는 이야기를 나눈다.  복음의 나팔을 크게 불라는 음성을 듣는다.

 

 

 

K는 수년 전부터 기분의 변동이 심해 다른 육체적 고통과 함께 조울증 증세를 보여 왔다.  때로는 말이 많아지고, 남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웃고 노래하며 기분이 한껏 올라간다.  그러다가도, 우울증세가 나타나면 방 속에 칩거한 채, 그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고 당장 죽을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온갖 고통 속에 잠겨 며칠을 홀로 보낸다. 

 물론 그녀가 전도를 할 때는 기분이 고조되었을 때이다.  자연 Funny Lady가 되어 상대방에게 칭찬과 격려를 쏟아 부어주니 상대의 마음이 자연 풀리지 않겠는가?  "히스패닉 계의 사람들은 정이 많아요.  관심을 갖고 접근하면 어려움 없이 마음을 열곤 합니다.  기분이 고조되면, 전도하다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고 망설이지도 않아요.  그때는 자신감이 넘쳐나거든요.  이것저것 가리지도 않지요" 

 

 

 이러한 K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은 참 놀라운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K의 조증(Manic state)이란 정신적인 증세를 이용하셔서 전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같은 임상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의 눈에는 그녀의 한껏 고조된 무드가 조증이라는 병적 증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치료하여 없애버려야 할 타겟인데, 하나님은 바로 그 병 증세까지도 선하게 이용하셔서 그녀로 하여금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담대하게 자신감이 넘쳐, 전도하게 하시는구나...  무드가 늘 안정되어 있는 나같은 정상인이 감히 하지 못하는 대담한 전도를 그녀가 하도록 하시는구나.  248명을 전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영접하게 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단지를 붙들고 기도한다니...   조증이 그녀로 하여금 전도의 포문을 열게 한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시기에.... 

 


 

 K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녀도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리며 말한다. "그래요, 훼까닥해야 전도도 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 전서 1장 27-29절]

 

 나의 약함과 실패와 고통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자.  사람들의 눈앞에서 수치스러웠던 나의 약점들이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는 순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도구가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 놓고 "성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고백하며 전적으로 당신을 의지하는 약한 자들을 즐겨 당신의 도구로 쓰시는 까닭이리라.   

 

 

살랑이며 쾌적하게 불어오는 오월 오후의 바람결에, 천사의 트럼펫의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져간다.  천사의 나팔꽃들이 만개한 뜰에서 K는 자신이 계속 입을 벌려 트럼펫을 불듯이 복음을 전할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복음을 전하지만,  그 모든 역사를 이뤄내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천사의 트럼펫 꽃처럼, 고개숙여 그 영광을 하나님께 겸허하게 돌려드릴 것임을 말하는 K의 얼굴이 5월 오후의 햇살 속에 유난히 빛난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후서 12장 9절]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사진: 2006년 5월.  노톤 사이몬 박물관(Norton Simon Museum,  Pasadena, CA) 정원에서.

글: 2006년 8월.  새벽에 쓰는 편지 제 73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