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쓰는 편지/계절의 향기

파피(Poppy)에게 배우는 지혜

wisdomwell 2008. 4. 14. 10:42

파피(Poppy)에게 배우는 지혜

 

 

 파피는 캘리포니아주의 주화(州花)입니다.  한국인에게 진달래가 그렇듯 파피는 남가주 주민들에겐 친구처럼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는 정다운 꽃입니다.  3월말(2005년) 야생의 파피꽃들을 보러 앤틸로프 벨리에 갔었습니다.  팜데일 시(市)가 가까워오면서 산 구릉을 노랗게 뒤덮고 있는 들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도로 연변에도 파피들이 주홍색으로 언덕 자락을 여기 저기 수놓고 있어 파피 보호구역에 무리지어 피어있을 파피의 군무(群舞)를 머릿속에 그리며 벌써부터 흥분되기 시작했습니다.  보호구역 입구가 가까운 길가엔 더 많은 파피꽃들이 황금빛 미소로 운전자들의 달리던 차를 멈추게 했습니다.

 

 드디어 파피 보호구역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온통 주홍빛 파피로 덮여 있을 들판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수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파피의 무리가 많지 않음을 보고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게 되었습니다. 

 

 

 

 


 자동차의 문을 열자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날리고 걷기가 힘들 정도로 광풍이 불어 다시 자동차로 돌아와 옷을 덧입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겨울 파카를 가져왔기에 모자까지 꼭꼭 매어 쓰고 단단히 무장(?)한 채 여기저기 그 광활한 들판과 산 언덕으로 이어지는 트레일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파피를 보러 이곳에 왔지만, 심한 바람 때문인지 작심하고 긴 오솔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파피들이 피어있는 들판들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꽃들이 심하게 부는 광풍으로 인해 제대로 자기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언덕에 올라서니 파피 대신, 눈앞에 우뚝 선 앞산과 그 산자락의 들판이 온통 노랑으로 물들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란 야생 데이지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피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지만 다른 들꽃들이 맘속에 남은 아쉬움을 싱그러운 기쁨으로 보상해주었습니다.

 


 오솔길을 따라 전개되는 들꽃들의 향연.  광야와 산등성을 온통 융단을 깔아 놓은 듯이 덮고 있는 액톤 데이지의 노랑의 물결,

 

 

주홍색 파피들의 춤,

 

 

바람결에 한쪽으로 눕곤 하는 키작은 갈대숲과 히끗히끗 소담한 래빗 브러시,

 

 

 바이올린을 닮은 피들 넥,

 

 

 

 

노란 들판에서 붉은 보랏빛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즐겁게 피어있는 올빼미 클로버와

 

바람에 흔들리는 루핀,

 

 

그리고 이름 모르는 작은 들꽃들... 

바람이 휘몰아치면, 몸까지 날아갈 것 같은데, 이 작은 꽃들은 수없이 계속되었을 이런 바람 속에서도 수많은 밤과, 추운 겨울날들을 참아내고 드디어 이렇게 꽃을 피웠구나...

 

 

 

 

 

 눈부시게 새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들이 산언덕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오솔길을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 구름들을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캔버스에 담긴 유화같이 산 구릉과 들판이 온통 노랑과 오렌지색과 연둣빛으로 채색되어 있었고 야생화들이 펼쳐진 들판 위에는 호젓한 오솔길이 잘못 탄 가르마처럼 가늘게 산언덕을 향해 끊기듯 이어져 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바람만 덜 불었다면...  저 파피 꽃들이 얼굴을 환히 펴고 얼마나 아름답게 웃고 있었겠는가?  파피의 주홍색 꽃잎들은 바람 때문에 도저히 얼굴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도 날아가 버릴 지경인데, 저 연약해 보이는 파피들은 어떻게 이 바람을 견딜 수 있단 말인가?  바람 때문에 꽃잎이 찢기지도 않고, 뽑히지도 않은 채 어떻게 이 바람 속에 생존할 수 있는 것일까?

 


 

파피에 관한 팜플렛을 보니 캘리포니아 파피는 그 꽃이 활짝 피었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황금 컵"(Copa de Ora, Cup of Gold)라는 이름과 함께 잠자는 자(sleepy one)라는 뜻의 도미데라(Dormidera)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밤이나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부는 날에는 꽃잎을 다물고 잠자듯 움추려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삶의 조건이 나쁠 때, 파피는 가능한 한 그 꽃잎을 닫고 몸을 축소시키므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추위와 광풍이 주는 악영향을 최소화 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가하는 세력들로부터 최대한으로 자신을 보호할 줄 아는 생존의 지혜를 갖고 있기에, 오늘 앤틸로프 밸리의 파피들은 바람 앞에 눈을 감고 오므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지혜로운 파피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바람을 역으로 이용하여, 수백, 수천의 파피 씨앗들을 바람에 실려 보내, 오히려 그의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그렇다면, 앤틸로프 밸리의 잦은 광풍은 그 바람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한 파피의 지혜로 인해, 이 가녀린 야생화의 생존을 위해서 오히려 실(失) 보다는 득(得)으로 작용해온 것을 보게 됩니다.  파피 보호구역으로 지정될 정도로 광활한 파피의 들판을 이루면서 말입니다.

 


 상처를 주는 세력 앞에, 악영향을 주는 환경 앞에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어, 그 영향력을 고스란히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때로는 우리 스스로가 그 악함이 가져온 비극과 고통에 골똘히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그 상처를 더 덧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바람 속에 인내하는 파피는 가르쳐 줍니다.  상처받지 않기로 결단하라고...  피해자가 되지 않기로 선택하라고... 오히려 그 고난의 시간들을 나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하나님의 알 수 없는 계획과 섭리를 신뢰하며 기다리는 침묵의 기회로 삼으라고...  그 바람이 내게 상처를 주는 대신 나의 성숙과 나의 존재의 그릇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역이용하라고 조용히 속삭여 줍니다.

 


 

 

햇빛이 밝고 바람이 잔잔하면, 파피들은 마음껏 그 꽃잎을 엽니다.  황금빛 빛나는 컵이 되어 자신에게 비추이는 햇빛을 하나 가득 꽃속에 담고 반짝입니다.  생명 있음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주시는 은총의 빛 앞에 최대한으로 자신을 열고 그 은혜에 잠깁니다.  이럴 때 파피들은 황금빛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골짜기와 들판을 짙은 오렌지 색깔로 물들여 놓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려움이 없는 일상의 시간들, 바람이 잠잠한 날들은, 최대한으로 나 자신을 열어 일상 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할 때가 아닐는지요?  나의 심장이 그대로 뛰고 있고 호흡할 수 있으며,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고, 그 해 아래서 피어나는 꽃향기를 맡으며 걸을 수 있고 일용할 양식과 머리 누울 곳을 갖게 해주신 그 은총의 빛을 향해 파피 꽃처럼 마음껏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쓰는 편지 (제 58신) 에서.
글, 사진: 이 영순   2005년 5월 (만개한 poppy  사진은 2008년 4월) Antelope Valley Poppy Reserve에서 촬영.

 

연결된 글:  야생화가 피는 들녘(파피들의 춤)을 클릭하시면, 2008년 4월 10일 촬영한 활짝 핀 파피들의 화려한 군무를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