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쓰는 편지/상담수첩

멈출 줄 모르는 사람들

wisdomwell 2007. 12. 29. 09:14

 멈출 줄 모르는 사람들

 

 지난 봄 부활절을 앞두고 유준(가명)과 함께 필드 트립을 갔습니다.  유준은 제가 상담하고 있는 소년으로 순진하고 심성이 고운 15세의 소년입니다.  정신연령이 낮아 아직 7,8세의 어린이처럼 행동합니다.  그를 데리고 샌 개브리엘 미션에 갔었습니다.  아침 햇살 속에 미션 뜰은 고즈넉했습니다.  나 혼자, 이 시간, 이 곳을 방문했더라면, 분명히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준을 동반한 Mission Trip은 사뭇 그 내용이 달랐습니다.  무엇인가가 내부에서 그를 충동질 하는 것처럼, 유준은 바빴습니다.  빨리 빨리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한 군데서 조용히 한 가지를 볼 수 없었습니다.  어느 한 곳에 초점을 맞출 수 없었습니다.  아니 집중의 능력을 결핍하고 있었습니다.  멈추어 서서 미션의 건물과 유물을 보며 생각에 잠길 수 없는 유준이었습니다.  마치 태엽을 감아주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 물불 가리지 않으며 달려야 하는 장난감 자동차처럼 그는 그냥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그의 내부에 무엇인가가 그를 쉬지 못하게 몰아 부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뇌의 신경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그런 모양입니다.  하여튼 유준은 계속 움직여 가야만 했습니다.

 


 

 

 미션 뜰의 정적, 고즈넉함도 유준을 붙들지 못했습니다.  성당 안의 성스러운 분위기도 그의 분망한 마음을 감싸 안을 수 없었습니다.  유준은 얼마나 피곤할까?  끊임없이 재촉하는 내부의 발동기가 그를 얼마나 지치게 만들까?  주님, 주님께서 유준을 붙들어 주소서.  조용히 멈추어 서서 주님, 만드신 세상을, 자연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그에게 허락하소서.

 

 

 

 문득 오래 전 영화 '분홍신(The Red Shoes)'이 생각났습니다.  안델센의 동화를 바탕으로 한 발레 영화였습니다.  무척이나 춤추기를 원했던 한 소녀가 마법의 분홍신을 얻어 신게 되지요.  발레의 대성공을 가져다 준 분홍신이었지만, 문제는 일단 그 신을 신은 이상 춤추기를 그칠 수가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계속 춤을 추어야만 했습니다.  거리로 산으로 들판으로 멈출 줄 모르고 춤을 추며 갑니다.  아무리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춤을 추다 지쳐 쓰러져 죽게 되면서 그녀의 춤은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유준처럼 신경정신적인 장애도 없고, 마법의 분홍신을 신은 것도 아닌데, 어딘지 모르게 이들을 닮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무엇인가 뚜렷하게 추구하는 것도 없으면서 무엇엔가 쫓기듯이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숨이 차도록 달려가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얻으면 더 얻어야겠다고 또 이를 악뭅니다.  남들이 달려가니까 나도 무턱대고 달려갑니다.  멈추어 설 줄을 모릅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물어보는 시간도 아까워 그냥 질주해 갑니다.

 

 

 

 학창 시절, 김흥호 목사님께서 '맹자(孟子)'를 강의하셨는데, 꼭 한 가지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지(知止).  멈출 줄을 안다는 뜻입니다.  일례로 물질에 대한 욕망의 한계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수준만큼 돈을 벌었으면 그 이상 벌어지는 것은 나의 소유로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멈출 줄을 알면 자연 온갖 욕심으로부터 해방될 소지가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도 참 부지런히 뛰어왔습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위해 뛰어 왔는지요?  잠시 멈추어 서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앞세우며 살았던 세월들이 보입니다.  12월, 이제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돌아볼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들을 조용히 묵상해 볼 때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시편 46: 10]

 

     주 안에서   이 영 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5신 (2000년 12월)에서
퍼온 사진: Mission San Gabriel/  Michael Powell의 The Red Shoes (1948년 영화)